최대 적자에도 전기요금 인상은 요원…새 정부서도 한전 전망은 '흐림'
입력 22.03.24 07:00
올해 적자 최대 20조…1분기 적자만 작년 한해 수준
연료비 연동제에도 2013년 이후 전기요금 사실상 동결
“전기요금 인상이 답인데”…원전이용률 높인다는 인수위
최대주주 산업은행, 협의체 꾸려 한전 지원 가능성도
  • 200원에 사 온 물건을 88원에 파는 회사가 있다. 팔면 팔수록 손해만 보는데 판매 가격은 10년 가까이 동결이다. 바로 국내 최대 공기업인 한국전력공사(한전)의 얘기다. 

    지난해 역대 최대 영업손실을 기록한 데 이어 올해 영업적자 규모는 최대 20조원까지 늘어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새 정부가 출범해도 상황은 녹록지 않아 보인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은 전기요금 인상 백지화 의지를 강력히 드러냈다. 최대주주인 산업은행이 협의체를 꾸려 한전 지원 방안을 논의 중인 것으로 알려졌는데, 전기요금 현실화라는 본질을 무시한 미봉책에 그친다는 비판이 나온다.

    한전은 지난해 최악의 시간을 보냈다. 역대 최대 규모인 5조8601억원의 연간 영업손실을 기록했다. 이는 금융위기로 국제유가가 치솟았던 2008년 연간 영업손실(2조7981억원)의 두 배를 웃돈다. 올해 상황은 더 나쁘다. 증권가에서는 올해 1분기 적자 규모가 지난해 연간 수준에 육박할 것으로 보고 있다. 금융정보업체 에프앤가이드에 따르면 증권사들은 올해 한전의 적자 규모를 14조원을 넘어설 것으로 보고 있다. 일각에서는 최대 20조원에 이를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대규모 적자의 원인은 결국 '전기료'다. 원자재 가격이 고공행진을 이어가는데 전기요금에 이를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2020년 4월 배럴당 10달러대까지 떨어졌던 두바이유는 8일 122.53달러로 최근 5년 이래 최고가를 찍었다. 국내 액화천연가스(LNG) 현물구매가격(JKM) 시세는 1년 사이에 7배 급등했다. 한전이 발전사에서 사 오는 전력도매가격(SMP)은 2월 기준 kWh당 197.32원으로 전월(154.42원) 대비 27.8% 급등했다. 지난해 2월보다는 무려 261%나 뛰었다. 

    전기요금은 2013년 11월 5.4% 오른 이후로 사실상 동결된 상태다. 현재 일반 가정용 전기요금은 kWh당 88.3원이다. 지난해 4분기 연료비 조정단가를 kWh당 3원 올려 kWh당 0.0원으로 책정했지만 이는 지난해 1분기 인하한 3원을 다시 원상 복귀한 수준이다. 올해 1분기도 kWh당 0.0원으로 정해 사실상 요금을 동결했다. 연료 구매 비용을 요금에 반영한 연료비 연동제가 지난해 시행됐지만 요금 조정을 유보하는 조항이 있어 실효성이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 증권사 연구원은 “연료비 연동제가 시행돼 있지만 예외적인 상황에 요금 인상을 당장 안 할 수 있다는 내용이 담겨 있어 전기요금에 원자재 인상값이 잘 반영되지 않고 있다”며 “규정대로라면 올려야 하는 것이 맞지만 정치적 요인 등이 맞물려 제대로 반영되지 않아 한전의 적자 규모만 커지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전기요금이 올라도 인상 규모는 과하게 작다. 판매가격과 도매가격의 차이가 100원에 달하는데, 4월에 올리는 인상 규모는 7원에 그친다. 인상돼도 적자 규모가 줄어드는 것이지 적자는 지속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낮은 전기요금이 신재생에너지의 경쟁력을 떨어트리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한 증권사 연구원은 “전기요금이 워낙 저렴하다 보니 신재생에너지들의 경제성도 떨어지고 있다”며 “요금이 오르면 기존에 경제성이 없다고 판단됐던 태양광이나 풍력도 경쟁력이 생기고, 태양광을 설치하는 가정이 늘면 가스발전소의 수요량을 대체하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 4월에 예고된 전기요금 인상은 불투명해졌다. 한전은 21일 예정됐던 2분기 연료비 조정단가 발표 일정을 하루 앞두고 돌연 연기했다. 한전은 홈페이지 공지를 통해 “2분기 전기요금 연료비 조정단가 산정내역과 관련해 관계부처 협의 등이 진행 중이며, 추후 그 결과를 회신받은 후 2분기 연료비 조정단가를 확정하는 것으로 통보받았다”고 밝혔다.

    이는 윤석열 당선인의 전기요금 인상 백지화 공약에 따른 것으로 풀이된다. 증권업계에선 연료비 조정단가가 동결된다면 한전의 적자 폭이 확대되는 것은 시간 문제로 보고 있다.

    적자를 메꿔야 하는 한전은 지난해부터 채권 발행량을 늘리고 있다. 지난해 6월부터 12월까지 한전이 찍어낸 물량만 10조4300억원에 달하는데 올해는 더 늘어날 전망이다. 업계에서는 한전이 올해 최소 10조원에서 15조원까지 발행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한전채의 오버발행은 크레딧 시장에 큰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AAA급 신용도인 한전은 민평금리 대비 10~20bp(1bp=0.01%포인트) 높게 발행하며 AA급 수준의 가격대를 형성하고 있다. 금리인상기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사태 등이 맞물리며 시장 불확실성이 커졌는데, AAA급 채권이 높은 금리로 발행되자 공사채는 물론 채권 시장 전반의 스프레드 확대로 이어지고 있다는 분석이다.

    신용평가사들도 한전의 대규모 적자에 우려를 드러내고 있다. 지난달 28일 국제 신용평가사 무디스는 "한전의 지난해 대규모 적자 실적은 신용도에 부정적 영향을 준다"고 밝혔다. 무디스는 연료비 증가를 상쇄할 수 있는 요금 인상과 더불어 비용 감소 및 설비 확장을 위한 투자 감소가 없다면 향후 12~18개월간 한전의 재무 지표에 압력이 발생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아무리 정부가 보증하는 공기업이더라도 지금 같은 재무구조 악화는 자금조달에 부담을 가하고 정상적인 경영 역시 어렵게 만든다. 새 정부에서도 한전에 대한 다양한 지원 방안을 논의하는 분위기다. 최근 대통령직인수위원회는 한전의 적자에 전기요금 인상 압박이 거세지자 원자력 발전 비중 확대를 검토할 방침인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70%대 수준인 원전 이용률을 90% 이상으로 끌어올리는 것인데 이는 미봉책에 그친다는 지적이다.

    문경원 메리츠증권 연구원은 “원전 이용률이 80%에서 90%로 10%포인트 개선할 경우, 약 3.75조원의 영업이익 개선 효과가 나타난다”며 “그러나 20조원 내외의 막대한 영업 적자가 예상되는 상황에서 이러한 개선 효과의 의미는 퇴색된다”고 지적했다. 요금 인상 전면 백지화 공약과 최근 천정부지로 솟아오른 원자재 가격을 감안하면 원전 이용률 개선에도 불구하고 대규모 적자는 불가피한 상황이라는 것이다. 

    한전 지분 32.9%를 갖고 있는 산업은행의 지원 가능성도 제기된다. 업계에 따르면 산은은 최근 협의체를 꾸리고 한전 지원 방안을 논의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대출 지원 방안도 거론됐지만 이는 한전과 산은 모두 원치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낮은 금리로 발행한 채권을 산은이 받아주거나 전기요금 인상분에 대한 지원금 등의 시나리오가 점쳐지는 상황이다. 

    다양한 한전 지원 방안이 논의되고 있지만 적자 원인인 전기요금 현실화가 이뤄져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 증권사 연구원은 “전기요금 인상이 가장 중요한데,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출범한 정부가 아니라 정권 초기부터 저항이 큰 전기요금 인상하긴 쉽지 않을 것”이라며 “문제는 작년부터 내년까지 3년 연속 적자가 예상되는데, 전기요금을 안 올려도 한전이 버틸 수 있는 상황인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또 다른 증권사 연구원은 “이대로 가면 에너지 안정성을 위협받는 수준까지 다다를 수 있는데, 에너지 정책이 뒷전으로 밀리고 있다”며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에너지 시장에 미치는 불안이 전체 경제에 큰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을 체감하고 있는 만큼, 원칙에 입각한 에너지 가격과 정책을 마련할 때”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