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높아진 블록체인 스타트업...갑을관계 '역전' 분위기도
입력 22.03.28 07:00
국내 빅하우스 VC·PE, 블록체인 기업 투자 수요 높아
실력있는 개발자는 빅테크로…”투자할 기업은 적어”
“돈만 대는 투자는 필요 없어”…레퓨까지 보는 기업들
“회사 발전에 도움될 비전까지 제시” 영업하는 VC
  • “벤처캐피탈(VC)와 블록체인 스타트업의 갑을 관계가 바뀐 지는 꽤 됐죠. 시장에 돈이 많다 보니 투자하겠다는 기관은 많은데 실력 있는 블록체인 기업은 몇 안 되거든요. 투자만 한다고 해서는 안 받아요. 스타트업에 직접 찾아가서 우리한테 투자받으면 이것저것 도와줄 수 있다고 성장 로드맵을 짜주면서 투자를 제안하는 상황이죠.” (한 벤처캐피탈 관계자)

    투자자와 피투자자 사이의 전통적인 관계가 뒤집어졌다. 가상자산 시장이 제도권으로 편입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풍부한 유동성이 지속되면서 투자하겠다는 수요는 많은데, 관련 스타트업들은 투자를 고사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이들 블록체인 스타트업들은 투자사의 레퓨테이션, 블록체인 관련 트렉 레코드 등 투자자금 외 요소들을 까다롭게 보고 기업공개(IPO)나 인수합병(M&A) 등 성장 로드맵까지 요구하는 모습이다.

    20일 업계에 따르면 블록체인 스타트업에 대한 투자 수요는 국내 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도 크게 늘어나고 있다. 글로벌 회계 컨설팅 기업 KPMG에 따르면 지난해 블록체인 및 가상자산 기술에 대한 투자액은 302억 달러(36조1000억원)로 2020년(55억 달러)에서 449% 급증했다. 같은 기간 투자 건수도 927건에서 1332건으로 43% 증가했다. 

    특히 국내는 VC 업계로 정책금융 출자 등으로 풍부한 자금이 유입되면서, 블록체인에 대한 투자 수요가 높아지고 있다는 분석이다. 블록체인 업계에서도 3년 전만 해도 펀드레이징이 어려웠는데 작년을 기점으로 이쪽 산업에 돈이 많이 몰리는 것을 체감하는 분위기다. 

    투자처를 찾아야 하는 투자사들은 골머리를 앓고 있는 형국이다. 시장에 돈이 풀리는 속도보다 투자할 만한 블록체인 스타트업이 적어지면서 ‘품귀현상’까지 발생해서다.

    최근 토스나 당근마켓, 두나무 등 빅테크 기업들은 창업할 만한 역량의 사람들을 거액을 주고 인력을 쓸어가고 있다. 이로 인해 실력 있는 기업이 등장하는 속도가 시중에 돈이 풀리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한 블록체인 업계 관계자는 “작년부터 투자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는데, 이상한 회사들까지도 펀드레이징하기 쉬워졌다”며 “버블이 많이 껴있어 몇 년 지나면 경쟁력 없는 회사들은 정리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투자사들도 블록체인 산업을 스터디하고 커뮤니티에 편입되고자 하지만, 투자 집행까지 쉽지 않은 분위기다. 한 대형 PE도 국내 블록체인 기업에 투자하려 했으나, 기본 티켓 사이즈가 너무 커 투자가 이뤄지지 않았다는 후문도 나온다. 

    한 대형 VC 관계자는 “블록체인 산업에 투자하려고 공부를 하지만 이해하는 속도보다 시장이 변하는 속도가 더 빠르다”며 “솔직히 블록체인 프로젝트가 말이 되든 안 되든 무시하면 안 되고 이 흐름 속에 같이 있어야 하는데, 블록체인 산업 특성상 자기들만의 커뮤니티가 끈끈하게 형성되어 있어 어떻게 접근할지 대다수 하우스가 고민일 것”이라고 말했다. 

    블록체인 스타트업과 투자사들이 원하는 투자방식이 다른 점도 난관이다. 블록체인 스타트업들은 에쿼티(주식)를 파는 것보다 토큰을 발행해 투자 받고 싶어 한다. 회사 경영의 자율성을 지킬 수 있고, 과정도 간단해서다. 반면 투자사들은 펀드에 토큰을 받을 수 없으니 에쿼티를 받는 구조로 투자를 집행해야 한다. 

    블록체인 스타트업들은 투자자금보다 투자 유치의 의미, 상징성에 더 무게를 두고 있다. 또 다른 블록체인 업계 관계자는 “자금이 필요해서 투자를 유치할 수도 있지만 이제는 어디에서 투자를 받았느냐의 의미가 더 중요하다”며 이 산업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곳으로부터 투자를 받으면 실력 있는 기업이라는 인증마크를 얻은 것 뿐만 아니라 파트너십의 의미도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거기다 국내보다는 해외, 혹은 기업형 벤처캐피탈(CVC)들을 매력적인 투자자로 여기는 모습이다. 대기업이나 글로벌 투자사 아래 VC들은 모그룹의 투자 연계 기회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소프트벤처스가 투자한 아이유노와 제패토 등 기업들이 비전펀드의 투자유치로 이어진 것이 대표적이다. 

    한 블록체인 업계 관계자는 “이제는 패시브하게 돈만 투자하는 회사가 아니라 기업이 성장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투자자 유치를 원한다”며 “과거에는 스타트업들이 투자유치를 위해 발품 팔아 VC를 찾아갔다면 이제는 투자사들이 회사에 찾아와 산업에 이해도가 높고 엑시트 한 경력 등이 있는지를 영업하고 있다. 갑을관계가 뒤바뀌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