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호 SK스퀘어 대표의 "ARM 사고 싶다" 발언…어떻게 봐야 할까
입력 22.04.01 07:00
주총서 "ARM 사고 싶다" 발언…세간서 크게 회자
미래시장 선점할 핵심 IP…엔비디아도 인수 '포기'
SK하이닉스도 컨소 참여 검토…추가 우군 필요 전망
깜짝발언에 '투자 전문회사' 면모 만큼은 크게 부각
  • 박정호 SK스퀘어 대표가 첫 정기 주주총회에서 "ARM 사고 싶다"라고 발언한 데 이어 "컨소시엄 형태로 공동 인수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라고 밝혔다. 드디어 국내 반도체 시장에서 수평 통합이 아닌 이종 간 빅딜 사례가 나오는 걸까. 그것도 삼성전자가 아니라 SK스퀘어가? 실현 가능성이 있고 없고를 떠나 세간이 떠들썩할 만한 발언이다. 

    반도체 시장은 현재 엄청난 변화를 겪고 있다. 무어의 법칙이 깨지고 인텔 왕국이 몰락하며 각자 필요에 따라 칩을 설계해 공장에 맡기는 식으로 시장이 쪼개지고 있다. 인텔 CPU가 더 이상 시장 요구를 모두 충족할 만한 그릇이 아니게 됐다는 분석도 있지만, 정보통신기술(ICT) 기업 입장에서 훨씬 효율적인 대안이 마련된 덕이 크다. 바로 ARM의 설계 자산(IP)과 TSMC나 삼성전자의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 사업이다. 

    손정의 회장의 소프트뱅크그룹이 ARM을 인수한 것도, 엔비디아가 다시 이를 인수하겠다고 나선 것도 이 때문이다. 

    반도체는 명령어 집합(ISA)에 따라 크게 x86의 인텔과 ARM으로 나뉜다. 사물인터넷(IoT), 인공지능(AI), 자율주행 등 커질 시장은 훤히 보이는데 인텔 CPU 기반 생태계는 폭증하는 데이터 수요를 따라갈 만한 성능 개선을 보이지 않고 있다. 언젠가는 과거 인텔 시대를 이을 반도체 플랫폼이 나올 텐데, 손정의 회장은 ARM 인수를 통해 새 플랫폼의 기반 IP를 선점하려 했다. 

    실제로 애플과 삼성전자, 퀄컴은 모두 ARM 코어를 기반으로 스마트폰에 들어가는 모바일 AP 시장을 구축했다. 최근에는 구글, 아마존, 마이크로소프트도 ARM 코어를 기반으로 반도체를 설계하고 있다. 전체 매출액이 2조원 안팎인 ARM을 310억달러(원화 약 36조원)에 인수하고 4년 만에 400억달러(원화 약 48조원)에 되파는 거래가 성사될 뻔한 이유가 여기 있다. 

    그러니 박정호 대표의 "사고 싶다"라는 발언이 큰 반향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 

    반도체 기업이 ARM에 투자할 경우 기대할 수 있는 실익은 무궁무진하다. ARM 보유 IP의 플랫폼 가치를 극대화해 4차 산업혁명에 필수적인 새로운 반도체 플랫폼 시장을 개척할 수 있다. ARM의 광범위한 고객사 네트워크에 올라타 자사 주력 제품의 판로를 개척하는 것도 가능하다. 메타버스 트렌드가 부상한 시점에 어떤 형태로든 기업 가치에 도움이 되는 스토리와 결부시키기도 쉽다. ARM 인수 계획을 발표한 뒤 엔비디아가 제시한 청사진도 이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나 손정의 회장의 엑시트(투자회수) 목적 거래에 굳이 엔비디아 대타로 들어갈 필요가 있을까 하는 의문도 있다. 당초 손정의 회장이 비싸게 샀다는 목소리는 여전하다. 

    반도체 업계 한 관계자는 "소프트뱅크가 ARM을 인수하면서 내놨던 비전에는 지금도 공감하는 시선이 많지만 빅딜이란 파격 외에 소프트뱅크가 ARM의 플랫폼 가치를 제대로 활용했다는 평가는 없는 편이다"라며 "결국 손정의 회장이 비싸게 샀다는 평가가 중론인데, 소프트뱅크의 주주 환원을 위한 출구전략에 엔비디아 대신 SK가 참전할 이유가 없어 보인다"라고 설명했다. 

    사업적 수완이 높고 직접 반도체 사업을 영위하는 엔비디아가 추진할 당시만 해도 적임자란 평가가 많았다. 그러나 수완 좋은 엔비디아가 비싼 값을 주고 ARM의 IP 플랫폼을 가지려 한다는 이유는 그대로 반독점 규제에 가로막히는 주요 원인으로도 작용한 측면이 있다. 

    ARM이 보유한 IP 자체는 결코 높은 로열티 수익을 안겨주지 못한다. 인텔의 경우 자체 범용 CPU 기반으로 전체 컴퓨팅 시장 절반 이상을 독식하며 막대한 돈을 벌어들였다. 엔비디아 역시 GPU의 쓰임새가 늘어나자 막대한 마진을 챙긴 것으로 유명하다. ARM IP는 이 과정에서 빅테크가 인텔 독주체제에서 벗어나기 위한 대안 플랫폼으로 부상하긴 했으나, 주도권은 ARM이 아닌 빅테크에 있다는 시각이 더 많다. 

    결국 ARM의 높은 인수 가격이나 최근의 딜 무산 배경을 감안하면 2조원 수준 로열티 매출을 감내하면서 차세대 반도체 플랫폼 개척에 도전할 수 있는 수준이 돼야 한다는 얘기다. 엔비디아의 경우 ARM 인수 이전 네트워크 기술을 보유한 멜라녹스를 인수하며 관련 포트폴리오를 확보하기도 했다. 

    박정호 SK스퀘어 대표가 ARM을 단일 기업이 인수하는 것에 회의적 반응을 보인 것도 이 때문으로 보인다. 

    컨소시엄을 구성할 경우 우선 자회사인 SK하이닉스도 함께 참전할 것으로 보인다. 3월31일 SK하이닉스는 조회공시를 통해 "사업경쟁력 강화 및 기업가치 제고를 위하여 ARM 공동인수 등 다양한 전략적 방안을 지속적으로 검토 중이나, 현재까지 확정된 사항은 없다"며 추후 구체적인 내용이 확정되는 시점 또는 1개월 이내에 재공시하겠다고 밝혔다. 박정호 대표는 과거 SK하이닉스의 인텔 낸드 사업 인수와 키옥시아(도시바 메모리 사업) 지분투자에서도 협상을 주도한 것으로 전해진다. 

    모자회사가 함께 참여하더라도 다른 우군의 필요성은 높을 것으로 보인다. 

    ARM IP의 중요성은 비메모리 반도체 영역으로 SK하이닉스의 메모리 사업과 결이 아예 다르다. 키파운드리를 인수하며 파운드리 사업에도 힘을 싣고 있지만 이 역시 삼성전자나 TSMC의 선단공정과는 거리가 먼 아날로그 반도체 산업에 속한다. 고부가가치 로직 반도체 설계는 삼성전자 시스템LSI도 고전하고 있는 영역이기도 하다. 

    반도체업계 한 관계자는 "메모리와 비메모리는 아예 다른 산업이라고 봐도 무방하다"라며 "일각에서 키파운드리와 연관지어 바라보는 시각도 있는데 8인치 파운드리 사업을 위해 ARM을 인수한다는 건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얘기이고, SK그룹 외 우군이 필요할 것"이라고 전했다. 

    이 때문에 SK스퀘어를 비롯한 SK그룹 경영진이 점점 더 투자 전문회사로서 면모를 강하게 풍기려고 노력한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국내 기업 경영진 중 주주 앞에서 "ARM 사고 싶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다. 그 말 한마디로 SK스퀘어는 소프트뱅크 손을 거쳤고, 엔비디아가 인수에 실패한 ARM 투자를 검토하는 기업으로 비치게 됐다.

    SK스퀘어 공식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반도체·ICT 사업으로 축적된 경험과 SK하이닉스, SK쉴더스 등 투자 성과가 검증된 트랙레코드를 보유한 액티브 포트폴리오 매니지먼트 컴퍼니'라고 대문짝만 하게 쓰여 있다. 여느 사모펀드(PEF) 운용사의 소개 문구와 다르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