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세 못 올린 한전, 3분기 누적적자 21조…전국민이 대출이자로 갚고 있다
입력 22.11.15 07:00
취재노트
한전 연간 적자 30조 전망…파산 면하려 찍은 채권만 25조
발행시장 짓누르는 돌덩이…나비효과는 결국 금융시장으로
당국 '리스크 관리' 대응·경고에도 수급 일부 항상 막힌 셈
사고 계속되는데…언제든 불똥 튀며 재개될 수 있는 상황
  • "전기세 안 올려 발생한 한국전력 적자가 나비효과처럼 시장 스프레드(가산금리)를 밀어올리고, 결과적으로 금융사 조달 비용 증가로, 다시 금융소비자에 이자부담 형태로 전가되고 있다. 전 정부가 전기세를 안 올리고 묶어두며 발생한 최악의 적자 후폭풍을 전 국민이 대출이자로 나눠서 물어내고 있다고 보면 된다"

    한 증권사 채권발행(DCM) 담당 임원의 말이다. 한국전력공사가 올 들어 찍은 채권은 24조8900억원 규모다. 최고신용 등급(AAA)인데, 가장 최근 발행한 2년물 금리가 5.99%를 기록했다. 빌린 돈 못 갚을 가능성이 가장 낮은 회사가, 연 금리 6%를 제시하며, 계속 돈을 쓸어가고 있다는 얘기다. 그러니 채권 시장을 찾는 발행사 전체가 이보다 높은 이자를 쳐줘도 돈 구하기가 어렵다. 

    정부 당국이 한전에 채권 발행을 자제해달라고 당부했지만 달리 대안이 없다. 한전은 지금 파산하지 않으려고 채권을 찍고 있다. 

    한전은 3분기에만 7조5000억원 적자를 냈다. 이번 분기까지 누적 영업손실만 21조8000억원을 기록했다. 연간 기준으로는 30조원을 넘어설 가능성이 높다. 전기를 만들기 위해 구입하는 액화천연가스(LNG)와 석탄 가격이 두 배로 뛰었는데, 전기요금은 그대로인 탓이다. 

    이렇게 한전이 채권 찍어 마련한 돈은 에너지 구입 비용으로 대부분 해외로 빠져나갈 전망이다. 안 그래도 돈이 말라붙었는데 그나마 있는 시중 유동성을 박박 긁어 해외에 지불해야 한다는 얘기다.

    이런 와중에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은 지난 7일 "단기 성과에 집착해 선제적 리스크 관리를 소홀히 한 금융기관에는 책임을 명확히 하기 위한 조치를 병행하겠다"라고 밝혔다. 사실상 앞으로 문제를 일으키는 금융사에 대해선 책임을 묻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금융사가 리스크 관리에 만전을 기한다 하더라도 한전 문제를 해결하기 전까진 여전히 불씨가 살아 있는 구도다. 한전이 적자인 채로 사업을 이어가는 이상 시장에 공급되는 유동성 일부분이 담보로 잡혀 있는 셈이다. 여력이 없는 금융사들은 여기서 발생하는 비용 인상분을 소비자에 전가할 수밖에 없다. 

    시중은행 투자금융(IB) 담당 한 임원은 "전기요금을 올리지 않으면 한전채를 찍을 수밖에 없고 계속해서 시장 전반 조달 비용 인상 압력의 한 축으로 작용할 것"이라며 "금융 당국이 사고가 터지지 않도록 주시하거나 대응책을 마련해도 돈맥경화는 언제든 재발할 수 있는 상황이라 답답하다"라고 말했다. 

    레고랜드 사태에 묻혀 주목받지 못했지만 4분기 들어 스프레드가 튀어 오른 건 시중은행의 유동성 확보전도 한몫했다. 지난 9월 은행채 순발행액이 7조4600억원에 달했다. 특판예금이 쏟아지며 수신금리 경쟁도 치열했다. 당시 하나은행과 우리은행 등이 유동성커버리지비율(LCR) 규제 정상화에 대응하느라 진땀을 뺀 것으로 전해진다. 이미 이때 국채 대비 은행채 스프레드가 100bp(1bp=0.01%)를 넘어섰다. 

    레고랜드 사태가 터지자 금융당국이 은행장을 불러들이고 LCR 규제 정상화 계획을 6개월 뒤로 미룬 것도 이 때문이다. 시장 전체가 기름을 부은 김진태 강원도지사를 주목하고 있었지만 발화점은 규제 대응에 나선 은행의 유동성 확보전 때문이었던 탓이다. 은행 조달 비용이 치솟으면 대출금리도 덩달아 뛰고, 은행채에 밀려난 아랫단 발행사의 조달길도 막히게 된다.

    금융 당국 출신 한 인사는 "금융당국도 사고가 터지면 책임론에 휩싸일 수 있기 때문에 돈맥경화가 심화할 조짐을 보이면 최초의 도미노부터 찾아내 적극적으로 대응책을 내놓으려 주시하고 있다"라며 "당시 LCR 규제 정상화를 일시 유예한 것도 은행권 유동성 확보전을 잠시 중단하게 하기 위한 조치였던 것"이라 설명했다.

    그럼에도 흥국생명 신종자본증권 콜옵션(조기상환) 미행사 문제가 또 불거졌다. 한전채에서 발생하는 수급 왜곡도 결국 이와 무관하지 않다는 분석이 많다. 흥국생명은 자본성 증권의 조기상환 시점에 맞춰 차환 발행에 나섰지만 수요 확보에 실패했다. 외화채 발행이 막히면 원화 조달로 선회할 수도 있지만 결과적으로 당국이 은행권까지 끌어들여 환매조건부채권(RP)을 매도해 상환하는 것으로 겨우 결론이 났다.

    채권 시장 한 관계자는 "서로 무관해 보이지만 수급이 이렇게 꼬인 상황에서 원인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결국 한전채가 떡하니 버티고 있고 더 위로 올라가면 전 정부에서 전기세를 안 올려준 책임까지도 따져볼 수 있다"라며 "작년 이후 에너지 가격이 두 배로 뛰었는데 전기세로 신음하지 않는 나라는 한국이 유일해 보인다. 공짜 점심은 없다고, 고통을 공기업인 한전이 떠맡는 게 아니라 시장 전체가 돌려받는 거라고 봐야 한다"라고 말했다.

    내년 2분기에는 금융사 자본성 증권의 콜옵션 행사 시점이 무더기로 돌아오는 데다 건전성 규제 비율 원복도 재개된다. 금리 인상이 언제 끝날지 불투명한 만큼 채권 시장의 매수 주체들도 계속 소극적으로 움직일 가능성이 높다. 인기 없는 전기요금 인상책이 얼마나 관철될지도 불투명하다.

    금융 당국의 주문대로 금융사들 역시 리스크 관리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년 상황에 대한 우려는 좀처럼 잦아들지 않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