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국의 원화 융통성은 만사형통?…어려워질 곳들은 결국 어려워진다
입력 22.11.16 07:00
취재노트
피치 "정부, 피할 수 있는 상황 피할 것"
모럴헤저드 용인 의미는 아냐
  • 팬데믹 기간 동안 한국의 가계부채 증가 속도 및 규모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이었다. 집값 상승 속도가 그만큼 빨랐고, 금융권 전체가 부동산에 뛰어들었다. 고금리로 빠르게 전환되자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리스크는 금융 시장 뇌관이 됐다. 그리고 한전채, 레고랜드 및 흥국생명 사태는 불을 붙였다.

    그래서 국내뿐 아니라 아시아-태평양 금융시장도 한국 금융시장의 건전성 문제를 유심하게 보고 있다. 국제 신용평가사들도 국내 은행, 보험사, 증권사들에 대해 지속적인 코멘트들을 내놓고 있다.

    피치(Fitch Ratings)가 3년만에 개최한 오프라인 세미나에서 한국 국가 신용등급은 물론 은행을 중심으로 한 국내 금융권을 주요 타깃으로 삼은 것도 같은 이유다. 세미나 이후 진행된 미디어브리핑에서 나온 피치 관계자의 멘트가 귀에 계속 맴돈다.

    "현재 한국의 유동성 위기는 원화 시장에서 일어난 것이다. 이는 금융당국이 필요하면 충분히 조정할 수 있다. 상당한 융통성을 발휘해서 피할 수 있는 상황은 피하려고 할 거다. 원화라서 아주 다양한 방법들이 있다. 그 과정에서 어려워지는 곳들은 결국 어려워질 것이다"

    조금은 떨어진 곳에서 본 한국의 유동성 위기는 정확히 얘기하면 유동성이 메말랐기 보단 신용 위기라고 할 수 있고, 화폐 측면에서 보면 아직까진 '원화'라고 하는 제한적인 부분이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정부가 마음만 먹으면 큰 문제로 확산되지 않을 거란 얘기다.

    이는 자칫 모럴헤저드를 일반화할 수도 있다. "현재 어디 하나가 터지면 연쇄적으로 터진다. 그러니 우선은 그걸 막아야 한다. 모두가 어려우니 고통을 분담하자"는 당국의 압박에 금융사나 기업들은 동참하지 않을 수 없다. 이미 금융권 안에서도 "사고는 저쪽에서 터졌는데 책임은 왜 우리가 져야하냐"는 볼멘소리가 나온다. 팬데믹 동안 연명하던 좀비기업들이 다시 한 번 생명줄을 부여받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최근 잇따른 엇박자로 질타를 받은 정부와 금융당국이다. 국제 신평사가 얘기한대로 더 이상의 혼란을 피하기 위해 원화를 통해 상당한 융통성을 발휘할 여지는 커졌다. 동시에 그 융통성으로 차후에 돌아올 고지서도 생각해야 한다.

    세미나에서 나왔던 한국전력공사(한전)에 대한 의견을 덧붙여 보겠다. 피치의 한전 독자신용등급은 2016년 bbb+, 2019년 bbb, 최근 bbb-로 하향세가 뚜렷하다.(물론 한전의 최종 신용등급은 한국 정부와 동일한 AA-이다)

    이 등급에서 부채비율은 이미 의미가 없다. bbb- 등급을 유지할 수 있는 건 '강력한' 자금 조달 능력 덕분이다. 사채 발행 규모가 제한적이지만 피치는 이 역시 정부가 적절한 시점에 개입해서 지원할 거라고 보고 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이 한전의 펀더멘털을 개선시켜주지 못한다. 모두가 다 알고 있지만 감내하기 싫은, 전기료 인상만이 유일한 해법이고 그 규모는 정부나 정치권, 한전이 예상하고 있는 수준은 당연히 넘어서야 한다.

    그러니 정부는 '원화 융통성'이라는 환상에서 미리 벗어날 필요가 있다. 다수의 지지를 받긴 어렵겠지만, 전부를 만족시킬 수 있는 건 없다. 재원은 한정돼 있다. 미래의 재원을 계속 내것인마냥 쓸 수 없다. "그 과정에서 어려워지는 곳들은 결국 어려워질 것이다"라는 바깥의 시선은 분명 아프지만 누군가에겐 위안과 명분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