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관치 우려 속...대주주와 행동주의 펀드의 '적대적 공생'
입력 22.12.20 07:00
취재노트
태광, 트러스톤 주주서한 후 흥국생명 증자 불참 공시
외풍·관치 심한 때 오너 방패삼을 만한 '주주 목소리'
소수주주 권익 위배되는 정부 요청 따르는 것도 부담
목소리 큰 새 주주 모셔오는 식으로 대응할 수도
  • 기업 활동에 대한 정부 입김이 예상보다 노골화하고 있다는 목소리가 많다. 외풍, 관치 논란이 부상하자 역설적으로 이를 핑계삼아 소수주주의 권익 개선 요구가 무마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기업이 오너 일가 뜻을 받들어 정부 압력에 맞서기는 부담스럽다. 그러나 정부 요구가 주주 이익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이유라면, 버텨볼 만하지 않겠냐는 얘기다. 

    지난 14일 흥국생명보험은 2800억원 규모 제3자배정증자를 결정했다고 밝혔다. 태광산업은 이번 증자에 참여하지 않는다. 다음날 태광산업의 지분 5.8%를 보유한 트러스톤자산운용은 투자 목적을 일반투자에서 경영참여 목적으로 변경한다고 공시했다. 트러스톤은 지난 13일 태광산업 이사진에 회사 이익을 최우선 고려해 흥국생명 증자 참여를 결정하라는 내용의 주주서한을 보냈다. 

    드러난 결과만 놓고 보자면 태광산업이 소수주주 요청을 받아들인 모양새다. 흥국생명은 태광산업과 같은 그룹 계열회사지만 직접적인 지분 관계는 없다. 이호진 전 태광그룹 회장이 지분 56.30%를 보유한 최대주주다. 흥국생명 자본을 보충하기 위한 자금은 계열 태광산업이 아닌 최대주주 이 전 회장 호주머니에서 나오는 것이 옳다. 태광산업이 증자에 참여할 경우 이 전 회장을 대신해 소수주주가 희생된다는 트러스톤 측의 지적이 합당한 셈이다. 

    그러나 흥국생명의 신종자본증권 콜옵션(조기상환권) 미행사 결정 당시 불거진 논란을 되짚어 보면 찜찜한 점이 적지 않다. 

    시장에선 ▲흥국생명의 콜옵션 미행사가 시장 충격으로 이어지자 ▲금융 당국의 안일한 대응이 문제를 키웠다는 비판 여론이 부상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태광그룹이 흥국생명의 자본 확충을 책임질 것이라는 결론이 마련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흥국생명이 신종자본증권의 차환 발행에 실패했으면 태광그룹이 자본 확충을 해서라도 대응하는 게 맞지 않겠냐는 정부 당국 의중을 따른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당시 금감원 관계자는 "콜옵션 관련 지급여력비율(RBC) 150% 기준이 명시된 보험업법 감독규정을 거스를 수 없었다는 건 말이 안 된다"라며 "시장 상황이 좋지 않다는 점을 이해하지만 흥국생명이 차환 발행에 실패한 게 주된 원인이고, 이 경우 증자 등 다른 방안을 통해서라도 자본을 확충하려는 노력을 기울였어야 했다. 태광그룹이 영세한 것도 아니지 않나"라고 말했다. 

    말대로 태광 '그룹'에 흥국생명 차환 발행 실패 책임을 묻는다면 알짜 기업인 태광산업이 나설 수밖에 없었다. 이 전 회장이 5억 달러 규모 외화 신종자본증권을 대체할 만한 자금을 확보하기도 어렵다. 이 전 회장이 지난 10년 동안 그룹 상장·비상장 계열사를 통해 수취한 배당 총액은 735억원 규모다. 적지 않은 돈이지만 흥국생명의 자본을 확충할 만큼은 아니다. 

    지난 3분기 말 기준 태광산업의 연결기준 보유 현금 및 현금성자산은 약 6251억원 규모로 흥국생명의 부족한 자본을 확충하기에 넉넉하다. 그러나 태광그룹(또는 이 전 회장) 입장에서 태광산업 보유 자금을 흥국생명에 수혈하고 싶었을 것이라 보기는 어렵다. 새 회계기준 도입에 따라 RBC 비율은 곧 사라질 기준으로 통한다. 채권 시장 혼란이 누그러진 뒤 다시 자본성 증권 발행에 나서는 방법도 있다. 

    그렇게 보자면 태광그룹(또는 이 전 회장)과 트러스톤 운용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게 되는 셈이다. 애당초 주주로서 트러스톤의 요구가 이치에 닿는 것도 사실이니, 태광그룹이 트러스톤의 요구를 전격적으로 받아들이는 형태로 정부 눈초리를 비껴갈 수 있다는 얘기다. 

    현재 시장에선 손태승 우리금융 회장에 대한 금융 당국의 추가 중징계 결정에 이어 조용병 신한금융그룹 회장이 갑작스레 용퇴한 것을 두고 관치와 외풍 우려가 상당하다. 마찬가지로 주인 없는 회사인 포스코와 KT그룹의 회장직 거취에 대해서도 예의주시하는 분위기가 짙다. 시장에서는 역대 정부마다 비슷한 일이 반복돼 온 일이지만 현시점 기업 경영에 무슨 도움이 되느냐는 비판이 점점 늘고 있다. 우리금융의 경우 벌써부터 '이럴 거면 민영화는 왜 했느냐'라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이런 상황에서 차라리 목소리 큰 새 주주를 모셔오는 것이 외풍을 효과적으로 막기 위한 대안으로 부상할 수도 있겠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정부 입김으로부터도 비교적 자유로운 외국계 재무적 투자자(FI)를 유치한 뒤 사외이사 자리를 뚝 떼어주고 외풍이 불 때마다 '이사회 독립성'을 강조하는 식으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