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년 KT맨 구현모가 떠나는 자리…33명의 후보가 벌이는 촌극(寸劇)
입력 23.02.27 07:00
취재노트
  • 지난해 민영화 20주년을 맞은 KT는 '주인 없는 회사', 여전히 공기업과 민간기업 그 애매한 선상에 걸쳐있다. 회장 자리엔 정부와 여당의 '코드' 인사란 꼬리표가 붙었고 선임 과정엔 늘 논란이 일었다.

    KT의 수식어는 '제1의 국가기간통신망' 사업자이다. 그 위상은 보는 이에 따라 다르겠지만 주요지역에 민·관·군이 이용하는 통신전자 시설을 운용하고, 유사시에는 통신망을 통합해 운용하는 공공재로서 역할을 하게 된다.

    국가 기간산업으로서 상당히 중요한 위치임에는 틀림없지만 최근 KT가 보여준 대표이사 선임 과정에서 그 중요도와 비례하는 무게감을 찾아보긴 어렵다.

    KT는 2020년부터 '대표이사 회장' 제도를 '대표이사 사장' 제도로  개편했다. 올해 주총에 앞서 KT는 일찌감치 대표이사 후보를 정하고 공표했는데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장(CIO)의 말 한마디로 인선 작업을 다시 시작하게 됐다. 여기서부터 2023년 버전의 촌극이 시작된다.

    이사회가 구현모 대표이사를 차기 대표이사 후보로 추대(2022년 12월 18일)한 직후, 국민연금은 보도자료를 통해 사실상 반대 입장을 나타냈다. 서원주 국민연금 CIO가 취임한지 하루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공모가 진행되자 34명의 후보가 몰렸다. 사내에선 16명의 후보가, 외부에서 18명의 후보가 지원했다. 한국을 대표하는 통신사 대표이사 자리에 30명이 넘는 인사들이 몰려들어 기웃거리는 모습이 전례 없는 장관을 연출했다.

    사실 대표이사를 공모하고 수십명의 지원자를 하나하나 공개하며, 컷오프 과정을 중개하는 등 민낯을 드러내는 민간 기업의 전례는 찾아보기 힘들다. 물론 등떠밀려 투명성을 강요당한 KT의 상황도 일견 이해할만하다.

    예상대로 면면(面面)은 화려했다. 여권 출신 인사, 전현직 공직자, KT를 떠난지 10년 이상이 지난 올드맨들이 대거 포함했다. 이 가운데 사장급 전문경영인 출신은 손에 꼽는다. KT에 대한 오롯한 충심(忠心)으로 보이는 이들이 많지 않다. 아마 "KT의 (과거) 회장 자리가 (여러모로) 재벌 회장 자리보다 낫다"는 말의 의미를 여기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2년 이상의 재직자 부사장급 이상 총 16명의 사내 후보는 허수(虛數)일 가능성이 높다. KT는 구현모 대표이사를 연임 대상자로 선정하기까지 총 13명의 사내후보자를 검토했고 7차례 심사과정을 거쳤다. 구현모 대표이사 대신 다른 사내 후보자를 최종 후보로 다시 선정한다면 자체 심사 과정의 오류를 인정해야 하는 딜레마에 빠질 수밖에 없다.

    국민연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재차 경선에 뛰었들었을 정도로 강한 연임 의지를 나타낸 구현모 대표이사는 사실상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쫒겨나고 있는 과정으로 봐도 무방하다. 벌써부터 하마평이 시작됐는데 역시나 여권 인사들이 제 1순위로 거론된다.

    이쯤 되니 KT에 유일하게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국민연금의 관치(官治) 논란이 불거지는 것이 당연해 보인다. 대통령은 주인없는 회사에 대한 지배구조선진화를 주문했고 금융지주는 물론 KT, 포스코, KT&G 등 민간기업도 공기업도 아닌 기업들의 위기감은 더욱 높아졌다. 

    역시나 정부가 가장 손쉽게 휘두를 수 있는 칼은 국민연금의 '의결권'이다. 국민연금의 움직임이 현 정권의  의중으로 치환해 해석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수밖에 없는 상황들이 연출되고 있다. 외풍(外風)에서 절대 자유로울 수 없는 기업이 정권 교체 후 처음으로 CEO를 교체하는데 발표 당일 국민연금이 딴지를 걸기 시작했다는 것 만으로도 '낙하산 인사의 예고'로 오인(?)하기 쉽다.

    지배구조선진화 그리고 보다 투명한 인사 체계를 갖추라는 주문은 어떤 기업에 적용해도 이견을 갖기 어렵다. 그러나 국민연금이 KT 인선 과정에서 나타낸 입장이 과연 객관적이고 투명한 인선 과정을 담보하고 있는지는 따져봐야한다.

    '투명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실상의 '반대' 입장을 표명한 국민연금은 KT의 수장 교체에 대한 대안을 내놓지도 못했다. 경영진 면담, 주주서한발송, 주주제안 등 국민연금이 최대주주 자리를 지키는 동안 주주로서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기회는 너무도 많았다. 심지어 사외이사 풀(POOL)을 구성해 일부 기업에 적극적으로 이사를 추천하겠단 계획은 3년이 지나도록 가시화한게 없다. 이런 상황에서 유독 KT의 대표이사 선임에 문제가 있다며 사실상 도돌이표를 주문한 것이 어떤 의미로 비쳐질지는 생각해볼 문제다.

    KT는 이달 말 적격 후보자 숏리스트를 발표하고, 내달 초 최종 후보를 선정한다. 최종 후보에겐 넘어야 할 산이 많다. 새로운 CEO의 평가는 타의(他意)에 의해  물러나는 구 대표와 임기 내내 비교될 가능성이 높다. 

    디지털플랫폼기업(디지코KT) 전환이란 지난 3년 간의 사업을 이끌어 갈 수 있을지는 지켜봐야한다. 포스코가 그랬듯 자칫 전임의 치적을 뒤엎기 위한 새로운 전략들이 깜짝 등장할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다. 그리고 3년 뒤 KT에 똑같은 촌극이 반복하지 않으리라 장담할 수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