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 규제하려 해묵은 '법인결제' 꺼낸 금융당국…증권사들 '떨떠름'
입력 23.03.09 07:00
증권사, 16년 만에 결실 얻나…OCIO 확대 가능성도
정부, 마치 선물처럼 법인 지급결제 안건 꺼냈지만
心中엔 ‘금융 규제’…부동산PF 문제도 함께 지적
업계 분위기는 시큰둥…논의 멀었고 실효성 문제도
  • 금융 당국이 해묵은 ‘법인 대상 지급결제’ 안건을 꺼내들었다. 최근 이자 장사로 비판을 얻고 있는 은행권을 규제하기 위해 은행의 고유 권한을 타 금융회사에 분배, 경쟁을 촉진한다는 복안이다. 

    다만 막상 수혜의 대상이 된 증권사들은 떨떠름한 반응이다. 16년째 제자리 걸음이던 문제가 이제와서 해결되겠느냐는 의구심과 함께, 막상 실시해도 큰 이득은 없을 것이라는 시각이 주를 이룬다. 금융 당국이 법인 지급결제라는 ‘당근’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부동산 PFㆍ성과급 체계 개편 등 ‘채찍’도 함께 제시한 것도 불안 요소다. 

    8일 금융권에 따르면 최근 금융위원회와 금융감독원 등 금융 당국은 ‘은행권 경영ㆍ영업 관행 및 제도 개선 테스크포스’(이하 은행 제도개선TF)를 구성, 증권사ㆍ보험사들이 은행 대표 업무에 진입할 수 있도록 허용하겠다고 밝혔다. 은행의 주 업무인 지급결제와 대출ㆍ외환 분야에 타 금융업계의 진입을 허가하면 은행의 독과점 폐해를 방지할 수 있다는 게 정부 측 입장이다. 

    현 자본시장법상 개인은 증권사 계좌를 통해 자금을 송금ㆍ이체할 수 있지만, 법인은 불가능하다.법인은 반드시 은행의 가상계좌를 거쳐야만 증권사에서 결제 업무를 처리할 수 있다. 그러나 정부 구상이 실현되면 증권사들은 숙원사업이었던 법인 지급결제 권한을 얻고, 기업들은 증권사 계좌로 ‘회사 통장’을 만들 수 있게 된다. 

    기업들이 증권사 계좌로 제품 판매대금을 결제하고 협력업체 비용을 지불하거나, 근로자 월급과 어음을 지불할 수 있게 되는 셈이다. 

    표면적으로는 외부위탁운용관리(OCIO) 등 IB(기업금융) 사업 기회를 확대할 수 있는 수혜처럼 보이지만, 증권사들은 찜찜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당국이 나서서 ‘은행권 때리기’를 하는 타이밍에 해묵은 안건을 꺼내든 것이 공교롭다는 분위기다. 

    당초 증권사들은 지난 2007년 일종의 ‘가입비’ 명목으로 금융결제원에 특별분담금 약 4000억원을 지불했으나, 은행권의 반대로 시행이 무산됐다. 감사원 판결에 따르면 이중 3200억원 규모가 법인 지급결제망 진입을 전제로 각출한 금액이다. 분담금을 아직 돌려받지 못했기에, 증권사 입장에선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나 마찬가지다. 

    당국이 법인 지급결제 허가 건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증권사들의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관행을 동시에 언급한 것도 의미심장한 부분이다. 이복현 금감원장은 이달 2일 증권사 CEO와의 간담회 자리에서 증권사들이 성과급을 위해 부동산 PF 초기 성과에 과도하게 가중치를 부여하고 있고, 이 때문에 유동성 리스크가 발생할 수 있다고 강조한 바 있다. 

    증권업계 관계자는 “업황이 어려울 때도 증권사는 금융결제원에 각각 몇백억씩 각출해 왔는데, 은행의 몽니 때문에 10년 넘도록 당연한 걸 얻지 못했다”며 “뺏겼던 권리를 이제야 되찾겠다는 건데, 은행 규제 안건과 법인 지급결제 건을 같이 묶으면 안 된다. 은행의 피해자 코스프레 논리를 (당국이) 이용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지적했다. 

    증권업계 일각에서는 법인 지급결제가 허가돼도 큰 이득이 없을 것이라는 회의적인 목소리도 나온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법인 지급결제 허가권이) 확실히 보장된다는 것도 아니고, 허가된다 한들 어떤 변화가 있을지 의문”이라며 “법인이라 해도 은행 고객들은 증권 고객으로 100% 이어지지 않는다. 리테일의 대부분은 결국 투자자 보호 인식이 강한 은행의 차지”라고 말했다.

    다른 관계자도 “아직까지 무형의 시도만 있는 논의 단계일 뿐”이라며 “큰 의미를 두고 있지 않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