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도 아니고”…'딸들의 반란' 고민하기 시작한 재계
입력 23.04.20 07:00
주요 기업들 맏아들에 경영권 넘기며 안정 꾀했지만
세금 부담에 승계 의미 줄어…딸들도 '자기 몫' 관심
승계 못한 기업들 딸 대접 고민…승계 후 분쟁 사례도
능력 입증한 여성 리더 부상…미리 재산 분배 고민도
  • 지금까지 우리나라 대기업과 경제계를 이끈 주역들은 모두 남성이었다. ‘대를 잇는다’는 유교적 정신, 지분을 나눠줄 경우 경영 지배력 약화 등 다양한 원인이 있었는데 앞으로는 상황이 좀 달라질 전망이다. 상속세 부담에 대를 내려갈수록 경영권의 의미는 퇴색하고 있다. 각 분야에서 경영 능력을 입증하는 오너일가 여성 구성원들은 양보 대신 ‘자기 몫’을 주장할 가능성이 크다. 예전엔 ‘형제의 난’만 벌어졌다면 이제는 ‘남매의 난’을 볼 일도 전보다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LG그룹은 지금까지 경영권 ‘장자승계’ 원칙을 일관되게 지켜 왔으나 올해 들어 구광모 회장의 어머니 김영식 여사와 여동생 구연경 LG복지재단 대표 등이 상속회복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범LG가에서도 장자승계 원칙이 약화하는 모습이다. 2000년 LG그룹에서 떨어져 나온 아워홈은 고 구자학 회장의 장남 구본성 전 부회장이 2016년부터 경영을 이끌었지만, 구 전 부회장이 2020년 보복운전 물의를 일으키며 변화가 생겼다. 경영능력을 인정받은 막내 구지은 아워홈 부회장이 두 언니의 도움을 받아 ‘남매의 난’에서 승리했고 지금까지 경영을 이끌고 있다.

    2021년 LG에서 계열분리된 LX그룹은 구본준 회장의 장녀 구연제씨가 주목받고 있다. 다른 그룹과 마찬가지로 장자인 구형모 부사장으로의 승계가 유력하긴 하지만, 구연제씨도 경영 일선에 등판할 가능성이 거론되고 있다. 구연제씨는 벤처캐피탈(VC) 업계에서 경험을 쌓았는데, 향후 LX그룹의 CVC로 돌아올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이들에게 있어 승계 지분은 물려받을 수는 있지만 팔 수는 없는 ‘상징적 재산’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장자 외 나머지 형제나 누이들은 다른 현물 자산을 가져가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이제는 그런 인식이 그룹 안에서도 약화되는 모습이 보인다. 희미해져 가는 창업 정신을 지키는 것보다는 정당한 자기 몫을 챙기는 것이 우선이라는 것이다. 지금까지 법과 절차에 따랐다지만 ‘장자승계’의 전근대적 인상은 피하기 어렵다. 여권 신장이라는 ESG의 한 목표와도 거리가 있다.

  • 삼성그룹에선 오랜 시간에 걸쳐 맏이이자 아들인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을 위한 승계 작업이 진행됐는데,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도 오빠 못지 않은 경영 수완을 가졌다는 평가가 있었다. 이 사장 측에서도 그룹에서 더 큰 일을 맡지 못한 점을 아쉬워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삼성그룹 창업주 고 이병철 회장의 딸 고 이인희 한솔그룹 고문, 이명희 신세계그룹 회장 등은 사업을 직접 이끌었다.

    한 자본시장 관계자는 “지금이 조선시대도 아닌데 남자만 승계에 나선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고 ESG 관점에서도 바람직하지 않다”며 “다른 그룹들도 승계 문제에서 여성들을 어떻게 대우할 것인 것 고민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다른 그룹에서도 경영에 본격적으로 참여하거나 이미 경영 능력을 입증한 사례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들을 과거처럼 승계 문제에서 배제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사후 분쟁 가능성을 막기 위해선 미리 자리나 재산을 나눠줘야 할 가능성이 있다. '처가 덕'을 보고자 하는 사위들의 존재감도 무시하기 어렵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의 장녀 최윤정씨와 차녀 최민정씨는 각각 바이오·의료 분야에서 경험을 쌓고 있다. 다만 이들과 남동생 최인근 패스키(passkey) 매니저는 아직 지주사 SK㈜의 주식을 갖고 있지 않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의 보유 지분(17.73%)을 나눠 받을 경우 승계 구도가 모호해질 가능성은 있다.

    현대차는 정의선 회장으로의 승계 작업이 아직 마무리되지 않았다. 승계 시나리오의 핵심은 정몽구 명예회장이 가진 핵심 지분(현대모비스 7.19%, 현대자동차 5.33%)을 정 회장 지배 아래로 옮기는 것이다. 일가를 이뤄 역량을 보여준 세 딸의 몫을 어떻게 나누느냐도 중요한 변수가 될 전망이다.

    CJ그룹 역시 이재현 회장의 장남 이선호 CJ제일제당 경영리더에 무게가 실려 있지만 이경후 CJ ENM 경영리더도 의미있는 지분을 가지고 있다. 차기 총수 자리는 이선호 경영리더에 돌아가더라도 CJ ENM은 원래부터 애착을 갖고 있던 이경후 경영리더가 이끌 것이란 예상이 나온다.

    박주형 금호석유화학 부사장은 오빠인 박준경 사장과 함께 차근차근 승진 가도를 걷고 있다. 금호가 역시 전통적으로 여성의 경영 참여를 금기시했는데, 박찬구 회장은 딸도 능력에 따라 경영에 참여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박 부사장은 대우인터내셔널을 거쳤고, 금호석화에서 구매재무담당 업무를 맡으며 역량을 보여 왔다.

    현대중공업그룹은 최근 몇 년간 신사업 추진에 속도를 내며 정기선 HD현대 사장 체제 다지기에 분주하다. 다만 정 사장의 HD현대 지분율을 아직 5.26%에 그친다. 아래로 정남이 아산나눔재단 상임이사, 정선이, 정예선 등 세 명의 동생도 있다. 현대중공업은 최근 주요 해운사 인수에 관심을 갖는 것으로 알려졌다. 경영 부담이 크지 않고 안정적인 사업을 딸들에게 물려주기 위한 포석을 다지는 것 아니냐는 평가도 나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