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ABCP '현장 실사' 해야하나...증권사간 '소송전' 결말에 쏠리는 시선
입력 23.05.12 07:00
中 에너지 기업 ABCP 소송 두고 증권업계 불안 증폭돼
2심서 1심 판결 뒤집고 주관사 실사 의무 일부 인정하자
현대차 “한화ㆍ이베스트證, 최소한의 도리 다하지 않아”
  • 증권업계가 현대차증권과 한화투자증권ㆍ이베스트투자증권의 소송 결과에 촉각을 기울이고 있다. 법원이 올해 2심에서 유동화증권을 기초자산으로 한 기업어음(ABCP)에 대해 국내 증권사들의 실사 의무를 인정하면서다. 

    대법원이 이달 안으로 심리불속행 기각(심리 없이 상고 기각) 결정을 내릴 경우, 증권사들은 ABCP 발행 과정에서 실사 내지 조사 의무를 이행해야 한다. 그간 글로벌 기업들의 회사채를 발행할 때 신용평가사들의 신용등급만을 기준 삼아 어음을 발행해왔는데, 2심 내용이 확정되면 현장에 실사 인력을 투입해야 하는 셈이다. 

    최근 증권업계에선 대법원이 이달 현대차증권의 손해배상 소송 내용을 확정할까봐 우려의 분위기가 감지된다. 심리불속행 제도에 따르면 대법원은 3~4개월 내 항소심의 판단을 그대로 확정, 재판을 종료할 수 있다. 이번 달이 최종심으로 넘어갈 수 있는 마지노선인 셈이다. 

    한화투자증권과 이베스트투자증권은 지난 2018년 중국 대형 에너지 기업(CERCG)이 지급보증한 자회사의 회사채를 기반으로 1600억원 규모의 ABCP를 사모 발행 및 판매했다. 이때 현대차증권이 두 증권사가 600억원 가량의 ABCP를 매수, 이중 100억원 상당은 부산은행에 셀다운(매입 후 재판매)한 뒤 나머지 500억원을 보유하고 있었다. 

    중국 에너지 기업이 어음에 대해 교차부도를 맞게 되자, 500억원을 잃게 된 현대차증권이 두 증권사를 상대로 부당이득반환 내지 손해배상 소송을 청구한 것이다. 김앤장과 법무법인 린이 현대차증권을 대리했으며, 세종과 지평은 한화투자증권을, 바른과 해광은 이베스트투자증권을 각각 대리했다.  

    앞선 1심에선 법원이 한화ㆍ이베스트투자증권의 손을 들어줬다. 그러나 항소심에선 원고와 피고 모두 50 대 50의 잘못이 인정돼, 현대차증권이 각사로부터 약 250억원의 손해배상을 받을 수 있게 됐다. 

    한 민법 전문 변호사는 “2심 판결에서 재판부 입장이 첨예하게 갈린 만큼, 상고 대상이 아니라고 판단해 심리하지 않고 기각할 가능성은 적다”면서도 “다만 최종 판결까지 이어지면 1년 이상의 시간이 소요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증권사들이 떠는 이유는 2심에서 재판부가 증권사의 실사 의무를 어느 정도 인정했기 때문이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금융기관(증권사)은 (ABCP 관련) 현금흐름에 대한 합리적인 수준의 실사 내지 조사를 함으로써 투자자보호의무를 부담하고, 이러한 의무는 사모의 방법으로 발행되었다는 이유만으로 배제된다고 볼 수 없다”고 판시했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판결이 확정되면 ABCP를 주선하는 회사라고 해도 직접 실사를 해야 한다는 방향으로 가이드가 생기기 때문에 결과에 주목하고 있다”며 “모든 증권사들이 외화사채 ABCP를 발행할 때 신평사에 대행을 맡겨 신용등급을 받는 방식으로 실사를 대체하고 있는데, 그렇게 되면 업무 부담이 크게 늘어난다”고 말했다. 

  • 업계에서는 실사 의무 확대뿐만 아니라 다수의 손해배상 소송에 휩싸일까봐 우려의 시선을 보내고 있다. 금융투자상품에 관한 전문성을 갖춘 기관 투자자들에게 금융상품을 판매하는 경우에도 불완전판매가 쉽게 성립돼, 배상 의무가 확대될 수 있다는 것이다. 

    부동산PF 관련 ABCP를 주로 주선하고 있는 중소형 증권사 관계자는 “신용등급 2개로 대체하는 것은 관행이 아니고 일종의 룰이다. 지급보증을 하는 회사까지 실사를 하도록 분위기를 조성한다면 일이 복잡해진다”며 “외국 회사, 특히 중국 회사 투자에 대해 더욱 보수적으로 접근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다른 증권사 관계자도 “소송을 제기한 현대차증권조차 ABCP를 주선할 때 현장실사를 신용등급으로 대체한다”며 “현장실사가 표준이 된다면 증권업계에 부담이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일각에서는 당시 현대차증권 임원들이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무리한 소송을 했다는 추측도 나온다. 현대차증권이 지난 2018년과 2019년 2년 연속 역대 최고 실적을 달성했는데, 이를 의식한 몇몇 임원들이 본인 임기 중 소송이 매듭지어지지 않을 것을 계산해 소를 제기한 게 아니겠느냐는 것이다. 

    다만 현대차증권 측은 한화ㆍ이베스트투자증권이 ‘최소한의 의무’를 다하지 않았기 때문에 소송을 제기한 것일뿐, 업계 전반의 실사 의무를 주장한 것은 아니라고 선을 긋고 있다. 

    ABCP처럼 증권사들이 대량 판매하는 상품의 거래 관행을 바꾸라는 것이 아니라, 양사가 회사채와 관련해 몇 가지 의심스러운 정황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외면했다는 것이다. 해당 건에 대해서는 충당금을 이미 적립해 실적에도 큰 영향이 없었으며, 이번 한 건의 소송의 결과에 따라 그간의 발행 관행이 바뀌지도 않을 것이란 입장이다.

    현대차증권의 항소심을 대리한 법무법인 린 이홍원 변호사는 “자본시장법에 의한 실사 의무를 인정하라는 게 아니라, 단지 사실 관계를 밝히자는 것”이라며 “(한화ㆍ이베스트는) 관계자가 뒷돈을 받은 정황이 있고, 정체 불명의 브로커를 통해 받은 자료를 국내 신평사에 전달한 게 조사의 전부였다. 최소한 발행사 내지는 보증사에 전화라도 한 번 해봤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게 우리 입장”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