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권사 리서치 속속 유료화...원인은 국민연금이 촉발한 '보릿고개'
입력 23.07.10 07:00
애널리스트 분석 리포트 유료화 행보 강화
일부 증권사, 무단 게시에 법적 다툼까지
국민연금 거래 증권사 축소 발표하자마자
애널리스트ㆍ리서치센터 입지 축소 가속화
  • "애널리스트들 사이에선 '우리는 섬유산업 종사자'라는 우스갯소리가 나온다. 한때 중심 산업이었지만, 이젠 아무도 찾지 않는 사양산업이라는 뜻이다. 코스닥이 이유 없이 반등하는 등 요즘처럼 기업 분석이 의미 없는 시장에서 애널리스트와 리서치센터의 입지는 더욱 좁아지고 있다."–A 증권사 임원

    국내 증권사들이 리서치센터에서 발간하는 리포트를 유료화하는 방안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일부 증권사는 이미 금융 당국에 유료 판매 업무를 신고하고 리서치 분석 자료를 제한적으로 공개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리포트 저작권을 두고 증권 분석 사이트 운영사와 법적 다툼까지 벌이는 상황이다. 

    표면적으로 지적재산권 보호를 내세우고 있지만, 배경에는 증권사 애널리스트 및 리서치센터의 입지 저하에 대한 조바심이 깔려있다는 게 중론이다. 증권업계에선 ‘큰 손’인 국민연금이 내년 상반기부터 거래 증권사를 대폭 축소하겠다는 의사를 전달한 것이 유료화 움직임의 기폭제가 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5일 증권가에 따르면 최근 주요 증권사들은 지적재산권을 강조하며 리서치센터에서 발간하는 분석 리포트를 유료화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교보증권은 이달부터 리서치센터에서 작성하는 보고서의 전문 중 일부만 공개할 예정이다. 무료 플랫폼에는 요약 자료만 공개되고, 전문은 회원 또는 개별 요청이 있을 경우에만 제공한다. 대부분의 증권사들은 이미 리서치 자료에 대한 유료 판매 업무를 신고한 상태다. 앞서 DB금융투자는 지난 2021년부터 보고서 전문을 자사 고객에게만 공개하고 있다. 

    지난달 금융감독원과 각 사 리서치센터장이 모인 비공개 간담회에서도 증권사 리포트 유료화를 장려할 수 있는 방안이 논의된 것으로 알려졌다. 당국과의 자리에서 리포트 유료화에 대한 논의가 이뤄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최근 한국투자증권과 현대차증권 등 국내 주요 증권사들이 증권 분석사이트를 운영하는 ‘한빛아이에이홀딩스’와 소송을 진행 중인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는 분석이다. 

    한국투자증권ㆍ현대차증권ㆍNH투자증권ㆍKB증권 등은 사이트에 증권사 리포트를 무단 게시하는 한빛아이에이홀딩스를 상대로 저작권침해금지 가처분을 신청했다. 이중 한국투자증권과 현대차증권은 직접 본안 소송을 제기하고 법적 절차를 밟고 있다.  

    증권업계에선 일련의 유료화 행보가 리서치센터 경영난과 무관하지 않다는 지적이 나온다. 기업 및 시황을 분석하는 애널리스트들이 소속된 리서치센터는 소위 '돈 안 되는 부서'라는 인식이 강한 까닭이다. 

    애널리스트들은 브로커리지(위탁매매) 수익 비중이 높지만, 증권사들의 핵심 수익원은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과 대체투자 등을 중심으로 한 투자은행(IB), WM 등이다. 게다가 최근 공모펀드 시장이 축소되면서, 애널리스트들이 펀드 매니저에게 종목을 추천해주고 받는 수수료도 20% 이상 급감한 것으로 나타났다. 

  • 이 같은 상황에서 국민연금이 내년부터 거래 증권사를 축소하겠다고 밝히자, 수익성 악화에 대한 내부 불안감은 더욱 커지고 있다. 앞서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는 각 증권사에게 내년부터 국내주식 거래 증권사를 현재 36곳에서 26곳으로 축소하겠다는 내용의 의사를 전달한 바 있다. 

    올해 초 기준으로 국민연금의 국내주식 투자 규모가 약 135조8000억원에 달한다. 거래 수수료 bp(0.01%포인트)는 업계에서 가장 낮은 수준이지만, 거래 규모가 크다 보니 얻을 수 있는 수익도 적지 않다. 

    실제로 거래 증권사에서 탈락될 경우, 일부 증권사들은 홀세일(법인) 수익원의 20~30%가 사라지는 상황이다. 지난해케이프투자증권은 거래 증권사에서 탈락한 이후 수익성이 크게 약화돼 결국 리서치센터 조직을 폐쇄한 바 있다.

    한 중소형 증권사 리서치센터 소속 연구원은 “가뜩이나 IB부서의 눈치 때문에 셀 리포트(매도 보고서)을 쓰기도 어려운데, 국민연금이 거래 증권사마저 줄이겠다고 하니까 리서치센터의 존폐가 언급되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증권업계 일각에선 2차전지 열풍 이후 논란이 되고 있는 코스닥 매수 리포트 증가 현상도 리서치센터 입지 저하 때문이라는 주장이 나온다. 국민연금 등 대형 연기금의 거래 수수료가 증권사 법인영업 부서의 주 수익원이기 때문에, 애널리스트 역시 연기금 입맛에 맞는 보고서를 작성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이다.

    다른 금융권 관계자도 “과거엔 애널리스트들이 리테일(개인) 투자자 대비 가질 수 있는 정보량이 많았고, 한 회사를 집요하게 들여다 볼 수 있는 노동력도 있었지만 이젠 상황이 달라졌다”며 “정보의 우위에 서있지 못하게 된 애널리스트들이 개인 투자자들의 신뢰를 잃게 되고, 그러다보니 법인 영업에 집착해 리테일과 거리가 더욱 멀어지는 현 상황이 안타깝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