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판하면 게임 끝이지만"…이번엔 HMM 거리 둔 현대글로비스, '승자의 저주' 우려한 듯
입력 23.08.04 07:00
하림·SM 등 재계 19위 HMM보다 낮은 기업 기웃
매도자는 현대차 등 자금력 있는 기업 원했지만
검토 끝낸 현대차, HMM 인수 실익 작다고 결론
인수 부담 큰데 시너지·승계에 미칠 영향은 미미
재계 3위도 부담 느낀 매물…업황 출렁일 때 버틸 체력 미지수
  • HMM 인수전에 여러 기업들이 속속 출사표를 던지고 있지만 거래 전망은 불투명하다. 드러난 인수 후보들은 당장의 M&A 자금을 마련하기 버겁고, 앞으로 본격화할 해운업 침체 주기를 견딜 체력은 더더욱 부족하다. 이에 시장의 관심은 예비입찰 전까지 손꼽히는 대기업이 참전하느냐로 모이고 있다.

    해운업을 하려면 법을 개정해야 하는 포스코보다는 현대글로비스를 앞세운 현대차그룹이 움직이기에 수월할 것이란 평가다. 현대차는 승계의 핵심 축인 현대글로비스의 가치를 키울 방안도 강구해야 한다. 현대글로비스가 등장하는 순간 HMM 인수 경쟁은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기 때문에, 인수후보들도 현대차그룹의 동향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아쉬운 초반 흥행…매도자가 원한 포스코·현대차는 손사래

    지금까지 HMM 인수에 관심을 보이는 곳은 하림, SM, 동원, LX, 글로벌세아 등이다. 경쟁입찰 성립을 낙관하기 어렵다는 시선도 있었던 만큼 초기 흥행은 선방한 모습이다. 그러나 이들은 단독으로 막대한 HMM 인수자금을 댈 수 없다. 재무적투자자(FI), 금융사 등과 손을 잡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이들은 정부와 산업은행, 해양진흥공사가 원했던 곳으로 보긴 어렵다. 매도자는 재무적 여력이 충분한 굴지의 대기업이 HMM을 인수하길 바란다. 과거 한진해운 사태를 재현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포스코나 현대차가 중책을 맡을 유력한 후보로 꼽혔다. 이들 기업이 등장하면 기존 인수후보들은 들러리에 그칠 가능성이 크다. 정부와도 사전 교감이 끝났을 것이기 때문에 더 이상의 경쟁은 무의미하다.

    한 인수후보 측 관계자는 “현대차 같은 대기업이 등장하면 지금까지 한 인수 고민은 사실상 무의미해지기 때문에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다”며 “무리해서 따라붙다간 그룹 전체가 휘청일 수 있기 때문에 굳이 경쟁하지 않고 발을 뺄 것”이라고 말했다.

    정작 두 기업은 아직까지 별다른 움직임이 없다. 매도자가 여러 경로로 HMM 인수 의향을 물었지만 긍정적인 답을 얻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포스코는 해운업 진출이 숙원이다. 철광석과 유연탄 등 제철원료를 나를 벌크선 사업이 필요한데 법의 장벽에 막혀 있다. 관련 법에 따르면 포스코 같은 대량화물 화주가 해운업에 진출하려면 해운전문가 등으로 구성된 정책자문위원회를 거쳐야 한다. 여기서 긍정적인 결론을 기대하긴 어렵다. 법이 개정되지 않으면 포스코가 컨테이너 사업 주력인 HMM을 살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현대차그룹은 현대글로비스를 통해 해운업을 하고 있다. 그룹에 현대제철이 있긴 하지만 대량 화주로서 해운업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면 포스코보다 제약이 적다. 그럼에도 HMM 인수엔 손사래를 치고 있다. 이목을 모으게 될까 매도자의 투자설명서(IM) 수령 제안도 거절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대글로비스 역시 주력인 자동차 운반 외의 분야에는 관심이 없다는 뜻을 일찌감치 드러냈다.

    현대글로비스 측은 “앞서 밝힌대로 HMM 인수엔 관심이 없다”고 말했다. 현대차그룹 측도 “HMM을 인수한다면 현대글로비스가 나서겠지만, 전에 밝힌대로 참여하지 않는단 입장은 변함이 없다”고 말했다.

    현대차그룹과 글로비스, HMM 인수한다고 득이 될까

    현대차그룹은 과거 ‘우리 사업’에 대해 강한 애착을 보였다. 그룹의 모태와도 같은 현대건설 인수전에서 현대그룹을 제치고 승리해 적통으로 인정받았다. 당시 현대그룹 쪽에 줄을 선 금융사들과 거래를 끊으려 하는 바람에 금융사 경영진들이 진땀을 빼기도 했다. HMM 역시 1976년 설립한 아세아상선이 모태기 때문에 현대차그룹이 다시 가져올 명분은 있다.

    다만 정몽구 명예회장에서 정의선 회장 시대로 넘어오면서 현대차그룹의 색깔도 달라진 분위기다. 상징성보다는 실리를 찾는 기류가 강해졌다. 지난 수년간 그룹의 투자 행보는 로봇, 자율주행, 배터리 등 신사업에 집중돼 있다. 이런 분위기와 HMM 인수는 결이 잘 맞지 않는다. HMM 인수 시 글로벌 해운사가 탄생하게 되지만 자동차 운반과 컨테이너 사업 자체의 시너지 효과는 크지 않다.

  • 현대차그룹은 아직 정의선 회장으로의 승계가 마무리 되지 않았다. 정의선 회장이 지분 20%를 가진 현대글로비스가 향후 승계 작업에서 중하게 쓰일 가능성이 크다. 현대글로비스 가치를 키워 정의선 회장이 현대모비스 지분을 늘릴 재원으로 활용해야 한다. 현대글로비스가 주체로 나서 좋은 기업을 인수하면 정의선 회장의 지분율을 흔들지 않으면서도 회사의 가치를 높일 수 있다. HMM 역시 하나의 선택지였고, 이미 작년에 인수 효과까지 분석해둔 것으로 전해진다.

    현대차는 HMM 인수가 현대글로비스 기업가치 상승에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HMM 주가엔 득이 될 수 있으나, 현대글로비스의 주가엔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과거 한진그룹은 지주사 체제로 전환하고 후속 작업을 진행했다. 일련의 과정에서 오너 일가가 가진 대한항공 주식이 지주사 주식으로 전환됐는데, 대한항공 주가가 부진했던 터라 지배력 강화 효과가 크지 않았다. 당시 대한항공은 파산 위기의 한진해운을 지원해야 하는 부담이 커지며 주가가 힘을 쓰지 못했다.

    한 M&A 업계 관계자는 “현대차그룹은 이미 오래 전에 HMM 인수 효과를 분석했지만 실익이 크지 않다고 결론을 내렸다”며 “현대글로비스도 수조원에 달하는 인수자금, 침체하는 업황 등은 부담이라 HMM 인수전에 참여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재계 3위도 부담느끼는 HMM, 꼭 이번에 팔아야 할까

    현대글로비스는 시가총액 6조~7조원을 오가고, 자체적으로 마련할 수 있는 자금은 2조원 안팎으로 거론된다. 이것만으로도 다른 인수후보들과는 차이가 큰데 재계 3위라는 그룹의 둥지는 더 크다. 외부 자금을 조달하는 역량, 위기 시 재무완충력 면에서 비교가 되지 않는다.

    이런 현대차그룹조차 HMM 인수엔 부담을 느끼는 형국이다. 다른 후보 그룹들은 모두 HMM보다 기업집단 순위도 낮다. 저마다 포부를 드러내며 ‘새우가 고래를 삼킨다’는 인식을 경계하고 있지만, 불안한 시선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치밀한 구조를 짜고 자금을 끌어 모아 HMM을 사는 데까지는 성공하겠지만 결국은 ‘승자의 저주’가 되풀이될 가능성이 크다. 사실상 지난 3년간 HMM이 벌어둔 현금으로 HMM과 인수자가 버텨야 하는 구조다.

    산업은행 등은 이르면 올해 HMM 매각 계약을 체결하길 희망하고 있다. 그러나 HMM보다 작은 기업들이 인수했을 때의 폐해도 고려해봐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인수 후보 중에선 M&A 역량이 쌓이고, 해운업을 잘 아는 곳도 있지만 HMM은 지금까지의 경험과는 차원이 다른 대상이다. 한 걸음만 삐끗해도 유일 국적 원양선사 HMM과 인수 기업이 한꺼번에 위험에 처할 수 있다.

    다른 M&A 업계 관계자는 “지금까지 모습을 드러낸 곳들 모두 HMM을 어찌저찌 인수하더라도 업황이 출렁일 때 버틸 체력까지 있는지는 의문”이라며 “아직 금리 부담도 높은 상황이라 외부자금을 무리하게 끌어다 쓴다면 몇 년 뒤 HMM과 인수 기업이 통째로 M&A 시장에 나올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현대차그룹 같은 안정적인 기업이 나타날 환경이 만들어질 때까지 거래를 늦추는 것이 낫지 않겠냐는 시선도 있다. 즉 업황이 꺾이고 실적이 악화하면 자연히 HMM의 기업가치가 낮아지고, HMM을 싸게 산 인수자의 재무 완충 부담도 줄어든다는 것이다. 이 경우 매도자의 회수 실적은 조금 낮아지겠으나, HMM 위기 시 다시 투자해야 하는 위험성 역시 줄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