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사다난 SK·롯데·CJ, 올해 정기인사에서 찬바람 불까 촉각
입력 23.09.12 07:00
올해 완연한 경기 부진…대기업 비용·임원 감축 가능성
과감히 확장하던 SK, 시장 급변에 경영 성과도 미뤄져
수년째 '비상 체제' 롯데, 올해도 파격 인사날까 주시
구원투수만 주목받은 CJ, ENM 등 부진 책임공방 예상도
  • 내년도 정기인사를 앞둔 기업들이 살얼음판을 걷고 있다. 하반기부터 시름이 깊어진 작년과 달리 올해는 전체가 불황의 직격탄을 맞을 가능성이 크다. 한 두해 전만 하더라도 호황 속에 후한 승진 인사가 이어졌지만 이번엔 정반대 분위기가 연출될 것으로 예상된다.

    대부분 기업이 어려운 상황인데 그 중에서도 SK, 롯데, CJ의 인사 분위기가 가장 흉흉할 가능성이 크다. 작년 말~올해 초 위기 상황에서의 대응이 아쉬웠고 시장의 우려를 한 몸에 받았다. 시장에선 이들을 사실상 한 범주로 묶어 보기도 한다. 주력 사업들의 상황이 여전히 좋지 않은 터라 쇄신 혹은 문책성 인사가 이뤄질 것이란 예상이 나온다.

    한 증권업계 관계자는 “SK는 SK하이닉스와 SK온, 롯데는 롯데케미칼과 롯데건설, CJ는 CJ ENM 등의 부진과 자금조달 압박 문제를 가지고 있다”며 “여전히 시장에서 관심과 우려가 가장 많다”고 말했다.

    유동성 위기에 휘청한 SK, 재무성과도 미뤄져

    SK그룹은 ‘파이낸셜 스토리’를 앞세워 시장을 가장 잘 이해하고 활용했다. 유동성 긴축 시기엔 이런 적극성이 독이 됐다. 주요 금융사마다 SK그룹 계열 한도는 목에 찼고, 재무적투자자(FI)에 돈을 돌려주기는 어려워졌다. 세계적 경기 침체에 주력 계열사들의 실적과 주가도 지지부진했다. 수개월간 자금 사정에 발이 묶인 것이 뼈아팠다.

    SK이노베이션은 작년부터 SK온 투자유치에 나섰지만 투자자와 이견에 차일피일 시간이 끌렸다. 투자유치 조건은 박해졌고 시장 상황에 대응할 시기도 놓쳤다는 평가가 따랐다. SK하이닉스는 반도체 경기 부진, 솔리다임 정상화 문제로 애를 먹었다. SK그룹의 두 날개인 반도체와 배터리 모두 주춤하자 이들 일감을 받는 SK에코플랜트의 현금흐름도 흔들리는 등 연쇄효과가 이어졌다.

    SK텔레콤은 인적분할 후에도 견조한 실적을 이어갔지만 SK스퀘어는 고전을 면치 못했다. 작년 주요 계열사 상장이 무산되며 FI 자금을 돌려줘야 하는 과제를 여전히 안고 있다. 당초 포부와 달리 ICT(정보통신기술) 기업 가치는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고 SK하이닉스가 기댈 구석은 줄었다. 결과론적이지만 인적분할의 실익은 크지 않았다는 것이다. 최근 HBM(고대역폭메모리) 호재가 있다는 점은 긍정적이다.

    벌써부터 올해 정기인사 분위기가 좋지 않을 것이란 우려가 나오고 있다. 본격적으로 재무 성과를 내던 2021년말 SK그룹 정기인사에선 두 명의 부회장(장동현·김준) 승진이 있었고, 2년 연속 40대 사장도 배출됐다. 그러나 시장의 불안감이 고조된 작년 말 정기인사의 분위기는 달랐다. 세대 교체 이야기는 쏙 들어갔고, 기존 중역들이 자리를 지키며 안정성에 방점이 찍혔다.

    올해는 그보다도 분위기가 차가울 것이란 예상이 많다. 작년말 인사에선 시장 위축 분위기를 고려해 재무라인 인사들에 힘을 실었지만, 올해 재무 성적표는 썩 만족스럽다 보기 어렵다. 지금까지 파이낸셜 스토리의 주축으로 나섰던 각 계열사 임원들도 좌불안석이다. 위기론이 자주 거론된 계열사의 임원 사이에선 정기인사에서 재계약이 불발될까 걱정하는 분위기도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부회장이나 계열사 사장들의 입지도 전처럼 공고하다 보기 어렵다. 시장이 호황이고 실적이 좋을 때야 많은 보수를 받고 공을 알리는 것이 득이 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그룹 사정이 어렵고 최태원 회장도 상여를 받지 않는 상황에선 부회장이나 사장들의 성취를 드러내기 어렵다. 투자에서 회수까지의 간극이 멀어진 터라 당장 내놓을 성과가 마땅찮은 곳들은 더욱 불안할 수밖에 없다. 젊고 쟁쟁한 인사들이 많기 때문에 언제든 물갈이 인사가 이뤄질 가능성이 있다.

    수년 째 혁신 롯데, 케미칼·쇼핑 부진 지속

    롯데그룹은 중국의 사드 보복 이후 본격화한 위기가 예상보다 길어졌다. 많은 기업들이 코로나 팬데믹 후 유동성 호황을 누렸으나 유통과 음식료업, 호텔 등 롯데의 주력사업은 부진을 면치 못했다.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이 앞장서 변화와 혁신을 외쳤고 과감한 인사를 단행했다.

    대표적인 것이 2020년 8월의 인사다. 신 회장의 복심 황각규 부회장이 갑작스레 퇴진했다. 유통 사업 부진에 따른 문책성 인사란 평가가 따랐다. 그 동안 그룹의 핵심으로 활약한 전략부문도 대대적인 수술이 이뤄졌다. 이듬해 유통과 호텔 총괄 대표에 외부 인사를 앉혔고, 작년엔 라이벌 신세계그룹 출신 인사를 럭셔리부문장에 임명하는 등 히는 파격 인사가 단행됐다.

    롯데그룹은 작년말 정기인사에서도 ‘혁신’에 방점을 찍었다. 주요 사업군 대표 중 절반을 교체하고 젊은 피들을 대거 등용했다. 이 과정에서 송용덕 부회장 등 정통 롯데맨들이 대거 물러났고, 그룹 위기설을 불러온 롯데건설의 하석주 대표도 조기 사임했다. 롯데건설발 프로젝트파이낸싱(PF) 부실 우려에 대부분 계열사 최고재무책임자(CFO)들이 자금을 구하느라 진땀을 뺐다.

    ‘상시 비상’ 체제인 롯데그룹은 매년 쇄신 인사를 단행했지만 올해도 큰 효과를 기대하긴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핵심 축인 롯데케미칼과 롯데쇼핑의 부진은 계속되고 있다. 롯데쇼핑이 이베이코리아(현 지마켓)를 사지 않고, 롯데케미칼이 롯데에너지머티리얼즈(전 일진머티리얼즈)를 산 것은 최선의 선택이었지만 본격적인 인수 효과가 나기까진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롯데케미칼의 대형 해외 사업 투자 부담이 여전하고, 부동산 PF발 위험의 불씨도 완전히 꺼지지 않았다.

    롯데그룹에선 수년간 이어진 파격 인사에 대한 내부의 피로도가 적지 않은 분위기다. 그러나 신동빈 회장은 여전히 조직이 무겁고 수동적이라는 인식이 강한 것으로 알려져 또 한번 강도 높은 쇄신 인사가 이어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한 투자업계 관계자는 “기업은 실적이 악화하면 가장 먼저 비용 절감과 임원 감축을 생각할 수밖에 없다”며 “대부분 그룹의 상황이 좋지 않지만 석유화학, 유통 등 핵심 사업이 부진한 롯데그룹의 임원 인사에서 가장 찬바람이 불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엔터에 발목잡힌 CJ, 그룹 내 ‘네탓 공방’ 우려도

    CJ그룹은 2010년 ‘제 2 도약’ 선언 후 ‘그레이트 CJ’ ‘월드베스트 CJ’ 등 슬로건을 앞세워 적극적인 확장 전략을 폈다. 2019년 11월엔 ‘비상경영체제’를 선언하며 속도 조절에 나섰지만 이후에도 그룹 전반의 재무 부담은 이어졌다. 올해도 주력 계열사들이 실적과 주가를 관리하는 데 애를 먹었다. PF 부실 위험이 크지 않은 그룹 중에서 가장 급박한 자금 조달 행보를 보였다.

    CJ그룹은 2022년 정기 인사에서 임원 직급을 ‘경영리더’로 단일화하고 최대 규모 신임 임원을 승진하며 분위기 반전을 꾀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보다는 CJ CGV, CJ ENM 등 부진을 겪은 계열사에 어떤 구원투수가 등판하느냐가 더 주목을 받았다.

    현 시점에서 가장 아픈 손가락은 CJ ENM이다. CJ가 제일 잘한다는 ‘엔터 사업’의 핵심으로 승승장구할 때도 있지만 최근 상황은 녹록지 않다. 올해 상반기 어닝 쇼크를 기록했고 자산 매각 등도 크게 가시화하지 않고 있다. 1조원을 들여 인수한 미국 스튜디오 피프스시즌(전 엔데버콘텐츠)의 부진도 뼈아프다. ‘라라랜드’의 성공 후 몸값이 가장 높을 때 대규모 현금을 들여 인수한 것이 독이 되는 분위기다. 그룹 수뇌부의 의중이 반영된 거래였지만 관여한 인사들의 부담도 클 수밖에 없다.

    그룹 내 구조조정 전문가로 꼽히는 구창근 대표가 작년 말부터 CJ ENM을 이끌고 있다. 취임 후 ‘임원들이 이렇게 많은데도 그 좋던 회사를 망가뜨려 놨냐’며 격분한 것으로 알려졌다. 꾸준히 내부 구조조정 가능성이 거론되는 상황이라 앞으로 임원 인사 분위기도 좋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CJ그룹 차원의 문책성 인사가 이뤄질 가능성도 있다. CJ그룹은 ‘순혈주의’가 강하지만 M&A 등 투자와 전력 분야에서는 외부 출신 전문가를 중용하는 경우도 많았다. 전략 방향성이 확장과 축소를 오가는 사이 그룹의 가치는 크게 성장하지 않았다. 부진한 기업들이 으레 그렇듯 CJ에서도 이에 따른 책임 소재를 가르려는 시도가 있을 수 있다는 예상도 나온다. 이재현 CJ그룹 회장의 복심인 김홍기 CJ㈜ 대표의 행보에도 관심이 모이고 있다.

    한 금융업계 관계자는 “재계 수위권 기업에 비해 인력 확보가 쉽지 않은 CJ그룹은 특별 대우를 해주고 외부 인사를 영입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지금까지 그룹의 성적표를 보면 얼마나 효과가 있었는지 의문”이라며 “결국 그룹 내부의 책임 가르기와 권력 헤게모니 다툼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