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비디아 AI 독주에 제동 나선 테슬라…'줄타기' 필요한 국내 대기업들
입력 23.09.21 07:00
엔비디아 앞 늘어선 칩 구매행렬…'자립' 마친 테슬라
H100發 '황의 법칙'에 복병 부상한 테슬라 'Dojo' 공개
늘어난 AI 투자 부담에 '슈퍼두뇌' 빌려쓰는 '새로운 룰'
AI 주도권 경쟁서 존재감 부각…"국내사도 전략 고민 필요"
  • "왜 자동차 회사가 신경망 훈련을 위한 슈퍼컴퓨터를 만드는지 자주들 묻는데, 테슬라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질문이다. 테슬라는 기본적으로 하드코어 테크놀로지 기업이다" (2022년 9월, 피터 배넌 테슬라 저전력·실리콘엔지니어링 총괄 부사장, 테슬라 AI데이中) 

    엔비디아가 독점할 것 같던 인공지능(AI) 반도체 시장에서 테슬라가 예상치 못한 복병으로 부상하고 있다. 테슬라가 자체 설계한 가속기 D1 칩의 대규모 양산에 돌입하며 사내 슈퍼컴퓨터인 Dojo를 외부 공개하는 전략이 가시화한 덕이다. 엔비디아 입장에선 잠재 고객들이 자사 칩을 직접 살 필요성이 줄어들 수 있다는 얘기다. 

    엔비디아가 깔아둔 판에 테슬라가 게임의 법칙을 변경하고 나선 모양새다. 승패를 가리기엔 이른 시점이나, AI 기반 자율주행·로보틱스까지 주도권 경쟁에서 양사 존재감이 몇 단계 더 올라갔단 평이 많다. 이들을 고객사이자 경쟁사로 둔 삼성·현대차·SK 등 국내 그룹사로선 손을 잡느냐, 경쟁을 이어가느냐 고민이 불가피해졌단 분석도 나온다. 

    지난 11일(현지시각) 모건스탠리는 "도장에 들어와라(Enter the Dojo)"라는 내용의 보고서를 내고 테슬라 목표 주가를 기존 250달러에서 400달러로 60% 높여 잡았다. 일본 도장의 이름을 딴 테슬라의 사내 슈퍼컴퓨터 Dojo의 가치가 장기적으로 5000억달러(원화 약 664조원)에 달할 것이라는 게 보고서의 주요 골자다. 

    H100 앞세운 엔비디아 독식…수년 전 미리 '자립' 끝낸 테슬라

    투자업계에 따르면 테슬라는 내년 연말 Dojo의 성능을 100엑사플롭스 수준으로 확장하기 위해 지난 7월부터 D1 칩 양산 준비에 돌입했다. 1엑사플롭스는 초당 100경번 연산 능력을 의미한다. 구글이 지난 5월 엔비디아 H100 2만6000장으로 만든 최정상급 슈퍼컴퓨터가 26엑사플롭스 성능을 갖추고 있다. 테슬라가 이를 제치고 내년까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슈퍼컴퓨터를 확보하겠다고 공언한 것이다. 

    겉으로 보기엔 AI 역량을 구축하기 위해 H100 사재기에 뛰어든 구글·마이크로소프트·메타 등 빅테크 행보와 다르지 않다. 그러나 테슬라는 엔비디아 칩에 의존할 필요가 없다. 

    이미 수년 전 엔비디아 GPU가 자신들이 구축한 신경망 학습에 부적합하다 보고 직접 D1 칩을 설계한 덕이다. D1은 TSMC가 7나노미터(nm) 공정으로 찍어내 InFO-SoW 후공정으로 패키징한 Dojo의 최소 단위 칩이다. 엔비디아에 높은 마진을 물어줄 필요도, TSMC 생산 한계로 인한 대기도 없이 AI 역량을 끌어올릴 수 있다는 얘기다.

    투자업계에선 자율주행에 이어 로보틱스 구현을 위한 AI 역량에서 테슬라와 경쟁사 간 격차가 더 벌어지는 분기점으로도 받아들여지고 있다. 테슬라는 자율주행(FSD) 구현을 위한 AI 학습용 주행 정보를 이미 경쟁사가 따라잡을 수 없는 수준까지 확보한 상황이다. Dojo가 더 똑똑해지는 게 테슬라가 완전자율주행에 더 가까워지는 것은 물론 양산형 로봇 개발 속도를 한층 더 끌어올리는 계기가 될 것이란 설명이다. 

    컨설팅업계 한 관계자는 "기업의 AI 역량은 결국 방대한 데이터와 이를 학습할 슈퍼컴퓨터, 그렇게 개발한 서비스 SW의 사업성으로 요약되는데 테슬라가 이 분야 1위인 구글을 넘보는 상황으로 조명 중"이라며 "자연스럽게 Dojo의 외부 공개, 즉 슈퍼컴퓨터 자체의 서비스 상품화 얘기가 나오게 된 상황이다. 쉽게 말하면 슈퍼 두뇌를 돈 받고 빌려주는 사업 격"이라고 말했다. 

    '황의 법칙(Huang's Law)' 대항마는 AMD 아닌 테슬라? 

    시장이 가장 주목하는 건 Dojo의 외부 공개, 즉 서비스 상품화(NNaaS) 가능성이다. 

    앞서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는 자율주행을 위한 Dojo의 사용처를 로봇 산업으로 확장한 데 이어 다른 산업에도 활용할 수 있다고 언급한 바 있다. 양질의 데이터를 가지고 있지만 자체 AI 학습용 두뇌를 확보하기 위한 투자비 감당이 힘든 기업에 Dojo를 공개할 수 있다는 얘기다. 시장에선 이커머스 기업이던 아마존이 아마존웹서비스(AWS)로 떼돈을 벌어가는 구조로 비유된다. 

    이 경우 계산이 크게 틀어지는 건 단연 엔비디아다. 

    엔비디아는 기업들이 직접 AI 학습용 서버를 구축하려 들어야 돈을 벌 수 있다. 실제로 서버용 AI 반도체에서 엔비디아 외 대안이 없으니 실제로 90% 수준 독점력을 발휘하고 있다. 반도체 업계에선 무어의 법칙을 대신해 젠슨 황 CEO의 이름을 딴 '황의 법칙'이 회자 중이다. AMD가 업계 기대에 부응해 제때 대항마 격 칩을 내놓지 못하면 엔비디아만 돈을 쓸어 담는 현재 구도가 굳어질 거란 전망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갈수록 비싸지고 구하기도 힘든 엔비디아 칩을 구매해 직접 서버를 짓는 것보다 테슬라 Dojo에 이용료를 지불하는 게 경제적이라는 판단이 우세해질 경우 이 같은 전략을 이어가기 어려워진다. 팹리스(반도체 설계 전문)도 종합반도체기업(IDM)도 아닌 테슬라가 대항마가 되는 셈이다. 

    투자업계 한 관계자는 "안 그래도 엔비디아 GPU로 서버를 구축하는 비용이 종전 대비 4~5배로 치솟으면서 빅테크들의 투자지출(CAPEX) 부담이 무더기로 늘었다"라며 "그렇게 확보한 AI 서비스가 사업성을 갖추지 못했을 때 리스크를 감안하면 Dojo가 파고들 여지가 충분하다"라고 말했다. 

    삼성·현대차·SK엔 고객이자 경쟁사…남은 건 '줄타기' 고민? 

    Dojo가 카메라나 센서 등이 확보한 시각 정보 학습에 특화한 모델인 만큼 아직 결과를 점치기 어렵다는 지적도 적지 않다. 테슬라의 Dojo 외부 공개 시점 역시 아직은 불확실하다. 그러나 엔비디아나 테슬라 모두 AI 시장 개화기에 쉽게 쫓아가기 힘든 수준의 경쟁력을 갖추고 주도권 경쟁을 벌이고 있다는 게 시장의 중평이다. 

    삼성이나 현대차, SK그룹 등 국내 주요 대기업은 이들이 고객사인 동시에 경쟁사다. 메모리에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엔비디아를 모시기 위해 경쟁을 벌인다면 로보틱스에선 삼성전자가 직접 현대차, 테슬라와 대결을 펼쳐야 하는 식이다. 동시에 파운드리나 시스템LSI에선 테슬라가 TSMC로 간 애플 이상의 잠재 큰 손으로 부상할 수도 있다. 현대차의 경우 직접 자율주행 전기차를 개발하고 있지만 테슬라와 경쟁하기 위해 엔비디아 자율주행 진영과 맞손을 잡는 대안도 거론된다.

    AI 시대 들어 글로벌 기업 간 주도권 경쟁이 한층 더 격화하는 가운데 국내 그룹사의 존재감이 흐릿해지고 있다는 시각도 적지 않다. 이 때문에 특정 영역에선 경쟁을 이어가기보다 맞손을 잡는 등 고민이 필요할 거란 지적도 나온다. 

    증권사 한 연구원은 "국내 그룹사들이 미래 먹거리로 선점한 영역 중에서도 SW 역량이 필요한 부분에 대해선 사실상 게임이 끝났다는 평가가 많았는데 AI 시장이 개화하면 격차가 벌어지는 속도가 더 가팔라질 것"이라며 "직접 경쟁을 이어가느냐 맞손을 잡느냐 줄타기 고민도 해봐야 할 시점"이라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