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진 꺼리는 증권가, '곳곳이 지뢰밭...일단 덮어두자'
입력 23.10.20 07:00
취재노트
책임은 크고 성과는 줄고…증권가 만연한 승진기피
부동산 부실, 자금줄 막힌 VC투자…성과급 기대감↓
  • “승진해봤자 뭐합니까. 어차피 신규 투자도 못합니다. 사고 터지면 뒷수습만 해야 하는데, 누가 맡으려고 할까요.”

    얼마전 만난 한 대형 운용사 임원이 내놓은 하소연이다. ‘억대연봉’ 증권맨들에게 쏟아지는 부러운 시선들도 이제는 옛말이 되는 분위기다. 파격 성과급을 기대해볼 만한 신규 투자처는 씨가 마른 반면 기존 투자건들 중에서 사고가 터질 가능성이 커지고 있어서다. ‘차라리 옷 벗는게 낫다’는 말도 단순한 푸념만이 아닌 듯 하다. 

    이 임원 역시 올해는 ‘승진이 문제가 아니다’라고 단호히 선을 그었다. 연봉은 둘째치고 ‘그 힘든 자리에 누가 오려고 하겠냐’라는 의미로 읽힌다. 이처럼 인사 시즌을 앞두고 증권업계에선 승진을 기피하는 사례가 속출하고 있다. ‘승진시킬까봐 대표를 피해 도망다닌다’는 우스갯소리도 들려온다. 

    그렇다고 외부 전문가 영입도 쉽지 않다. 또 다른 대형 운용사는 최근 국내 투자부문을 맡길 외부 인재를 물색했다가 결국 포기했다. 좀처럼 마땅한 인물을 찾기가 어려워 내부 인사가 울며 겨자먹기(?)로 책임자 자리에 올랐다는 후문이다. 두둑한 실탄도 없는데다 책임져야할 일은 많다보니 선뜻 스카우트 제안을 받아들일 인물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는 분석이다.

    그런데다 최근 증권가에선 크고 작은 사건들이 연이어 벌어지고 있다. 가장 두드러지는 분야는 해외부동산이다. 투자 당시 국내 기관투자자들을 상대로 벌인 셀다운(인수 후 재매각)이 여의치 않았던 만큼 가격 회복이 어렵다면 자칫 대규모 손실을 입을 수 있다. 

    부동산뿐만이 아니다. 역대급 증시 호황으로 막대한 투자수익을 올렸던 VC(벤처투자) 투자부문도 살얼음판을 걷고 있다. 이미 증권사들은 신규투자보단 사후관리 위주로 시스템을 전환하고 있고, 회사 차원에서 투자심의위원회(투심위)의 평가 기준도 한껏 높이고 있다는 후문이다. 

    어렵사리 투심을 통과했더라도 이번엔 투자 실탄을 모으기가 쉽지 않다. 국내 대부분의 기관들이 곳간을 닫아두고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터질 지 모르는 손실 사례들에 대해 추가로 자금을 넣는 ‘캐피탈콜(Capital Call)’에 대비하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증권업계에선 ‘책임론’이 또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연초부터 야금야금 터지고 있는 투자손실 건들을 모두가 나몰라라 한다는 지적이다. 승진은커녕 해당 투자를 진두지휘했던 담당자가 퇴사해버린 사례도 적지 않다. 결국 후임 책임자는 ‘임기만 넘기자’며 쉬쉬하고 덮어버리는 경우도 허다하다는 후문이다. 

    한 증권업계 관계자는 “어차피 증권사에서 승진해봤자 연봉 조금 더 받는 정도인데, 성과급마저 기대하기 어렵다보니 메리트가 사라진 것이 사실”이라며 “투자보단 사후관리에 집중해야 하는 요즘 같은 시기엔 다들 몸을 사릴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