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긴장감 풀어낸 배터리…그새 달라진 삼성과 현대차의 지형도
입력 23.10.24 07:00
취재노트
삼성SDI 현대차에 배터리 공급
1994년 삼성자동차 진출 이후 해빙무드
현대차 배터리 공급망 늘리는 효과
삼성SDI, 글로벌 TOP3 완성차 업체 고객사로
  • 삼성SDI가 현대차의 차세대 유럽향 전기차에 들어갈 배터리를 공급한다. 삼성이 현대차에 배터리 공급계약을 맺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제껏 재계를 대표하는 두 그룹의 협력은 거의 찾아보기 어려웠는데 이번 배터리 공급을 계기로 양사의 공생이 어디까지 확장할지 기대감을 갖는 투자자들이 많다.

    삼성과 현대차, 두 그룹 사이에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한 것은 벌써 30년전이다.

    1980년대만해도 현대차와 기아(당시 기아자동차)·대우자동차가 국내 자동차 시장을 과점하고 있었는데, 이는 1981년 자동차산업 합리화 조치, 즉 정부가 개별 기업들이 중복된 산업에 투자하지 못하도록 하면서 기업들의 경쟁력을 갖추도록 한 정책 때문이었다.

    전두환 정권이 막을 내린 직후 해당 조치는 즉시 해제됐고 삼성그룹은 1994년 삼성자동차 설립을 발표한다. 1998년 삼성자동차의 첫 완성차인 SM5가 출시되자 대중의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점점 잊혀져가고는 있지만  SM5는 아직까지 삼성차의 유일한 명작(名作) 중 하나로 회자된다.

    국내 자동차 시장에서 탄탄한 입지를 갖추고 있던 현대차에 삼성그룹의 등장은 상당한 부담이었다. 실제로 당시 경영진들은 삼성의 자동차 시장 진출 발표 이후 극도로 예민한 반응을 나타낸 것으로 전해진다. 

    외환위기 직후 삼성은 프랑스 르노(Renault)가, 대우는 미국의 제너럴모터스(GM)가 인수하면서 현대차는 졸지에 글로벌 완성차 메이커와 경쟁하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현대차그룹을 불편한 상황에 놓이게 한 삼성의 원죄(?)로 인해 정몽구 명예회장이 집권하고 있을 시기엔 사실상 양사의 협력을 기대하긴 어려울 것이란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이후 삼성과 현대차는 또 한번 맞붙었다. 2010년 독일의 반도체 회사 인피니온(Infineon)이 매물로 등장했을 당시 현대차는 차량용 반도체 시장 진출을 위해 검토에 나섰다. 삼성은 인수 가능성에는 부인했는데 당시 수면 아래서 현대차의 인수를 저지하기 위한 작업을 펼친 것으로 전해지기도 했다. 

    이후 삼성그룹은 2016년 미국의 전장업체 하만(Harmann)을 인수하며 본격적인 자동차 전장부품 사업에 진출하며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 듯 했다.

    다소 미묘한 기류의 변화가 나타난 건 2018년. 삼성전자 부사장(고문) 출신의 지영조 전 현대차 전략기술본부 사장이 "삼성전자와의 협력방안을 마련하겠다"고 공언하면서부터다. 삼성은 전장 시장에서 미래 먹거리를 찾고 있었고, 현대차도 삼성이란 든든한 글로벌 파트너와 손잡을 수 있다는 기대감이 있었다. 6개월 내 발표하겠단 양사의 협력방안은 6년내 감감 무소식이었다. 지영조 사장은 이미 현대차를 떠났다.

    2020년은 반전의 계기가 마련된 해다. 고(故) 이건희 회장이 별세했고, 같은달 정의선 회장이 회장직에 취임했다. 이에 앞서 정 회장(당시 부회장)은 삼성SDI의 천안사업장을, 이재용 회장은 현대차 R&D의 핵심인 남양연구소에 각각 방문했다. 당시 양사의 핵심인사들이 총출동하며 과거와는 다른 분위기를 연출했다.

    3년이 지난 현재, 삼성은 드디어 현대차와 배터리 공급 계약을 맺었다. 사실 이전에도 삼성은 차량용 OLED, 차량 인포테인먼트용 AP(애플리케이션프로세서), 카메라 모듈 등의 공급계약을 맺은 바 있지만, 배터리와 같은 핵심부품 계약이 아닌 탓에 주목받지 못했다.

    현대차는 이미 LG에너지솔루션, SK온, CATL 등 글로벌 배터리업체들과 공급계약을 맺고 있다. CATL은 삼성SDI가 생산하는 각형 배터리를 생산하는 업체다. 사실상 글로벌 수위의 배터리 기업들 가운데 삼성SDI만 배제돼 있던 상황에서 이번 계약을 통해 수급을 보다 안정화할 수 있는 효과를 보게 됐다는 평가를 받는다.

    삼성SDI는 현재 BMW, 스텔란티스, 폭스바겐 등 유럽완성차 업체를 주 거래처로 삼고 있었다. 이번 현대차와의 계약을 통해 공급망을 크게 확대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됐다. 현대차는 완성차 판매량은 지난해 기준 글로벌 3위이다.

    배터리, 디스플레이, 앞으론 반도체까지 삼성과 현대차의 협력분야는 앞으로도 상당히 많을 것으로 보인다. 미래차의 핵심인 배터리 협력이 시작되면서 양사의 공생이 어디까지 확장할 수 있을지 기대감을 갖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