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성그룹이 ‘선임 사외이사’ 제도 카드를 꺼냈다. 삼성SDI, 삼성SDS에 이어 삼성엔지니어링도 선임 사외이사 제도를 도입하기로 했다. 현재 사외이사가 이사회 의장을 맡고 있지 않은 삼성 계열사들도 선임사외이사 제도 도입을 검토할 예정이다. 삼성전자, 삼성전기, 삼성생명, 삼성화재, 삼성증권, 삼성카드, 삼성자산운용, 삼성물산 등은 이미 사외이사가 이사회 의장을 맡고 있어 선임사외이사 제도 도입 대상이 아니다.
선임 사외이사는 경영진에 주요 현안 관련 보고를 요청하고 ‘사외이사 회의’를 소집할 권한을 갖는다. 대표이사 또는 사내이사 등 기업 내부 인사가 이사회 의장을 맡고 있더라도 사외이사가 견제 기능을 충분히 할 수 있도록 보장한다는 게 취지다.
사외이사 이사회 의장 선임에 이어 선임 사외이사 제도까지 꺼내들면서 삼성그룹은 이사회의 독립성을 강화, 경영 투명성을 높이는 것에 방점을 찍고 있다.
이말인즉슨 삼성그룹이 과거 ‘미래전략실’ 같은 컨트럴타워의 구축 명분이 줄어들 수 있음을 의미한다. 개별 계열사의 이사회 영향력이 커지고 독립성도 높아지는만큼 큰 계열사에 몰아주는 수직적인 의사 결정을 하기 어려워진다. 산업군 별로 묶어놓은 사업지원 태스크포스(TF)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면 삼성전자를 위해 전자 계열사들이 희생(?)을 감수하기가 더 어려워진다는 얘기다.
재계 관계자는 “제도 도입 취지에 따르면 계열사 이사회는 그 회사를 위해 존재하는 만큼 그룹 차원의 대승적인 결정이라고 해서 큰 계열사를 위해 손해를 보게 놔두면 사실상 배임”이라며 “이렇게 되면 그룹 컨트롤타워 신설은커녕 기존 사업지원 TF의 존재감도 더 모호해질 수 있다”고 전했다.
그동안 삼성그룹의 컨트롤타워 구축 필요성은 꾸준하게 제기되고 있다. 국내외 경영환경에 불확실성이 커지고 M&A를 통한 신사업 경쟁력 확보가 절실해지면서 이재용 회장의 빠른 의사결정과 신속한 사업 추진을 위한 제2의 미래전략실(미전실) 부활이 필요하다는 거다.
심지어 미전실 폐지로 탄생한 준범감시위원회가 이를 부추길 정도다. 이찬희 준범감시위원장은 “작은 돛단배에는 컨트롤타워가 필요없지만 삼성은 어마어마하게 큰 항공모함”이라며 “컨트롤타워가 없으면 효율성과 통일성 측면에서 문제가 나타날 수 있다”고 컨트롤타워 필요성을 강조했다.
일각에선 삼성이 미전실을 부활시키면서 여론을 무마하기 위해 선임 사외이사 제도 도입 등 경영 투명성을 강조하고 있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그런데 현재 이 회장 입장에선 그럴만한 여유가 없다.
이재용 회장은 취임 1주년을 맞은 10월27일에 법원으로 가야했다. 이날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리는 '부당합병·회계부정' 1심 속행 공판에 출석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 회장은 앞서 삼성전자 이사회에서 회장 승진 안건이 의결된 작년 10월27일에도 재판에 출석했다.
미전실 때문에 재판을 받고 있는데 제2의 미전실을 만들수도 있다는 것이 재판에 긍정적으로 작용하긴 어려워보인다. 2020년 9월 기소돼 3년 넘게 재판을 받고 있다. 다음달 결심 공판에 이어 이르면 연내, 늦어도 내년 초에나 1심 결과가 나올 것으로 예상된다. 이제 본격 재판이 시작된 셈이고 만약에나마 유죄 판결이 나오면 경영 활동에 또다시 차질이 빚어질 수도 있다.
이재용 회장이 내놓고 있는 경영 투명성 방안들은 그동안 지적받았던 삼성의 수직적 지배구조를 수평적으로 개선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지속적으로 미전실 부활이 언급될수록 ‘대(大)를 위한 결정’과 ‘개별 기업의 독립성’이 서로 부딪히는 모순이 발생하게 되고 이는 이 회장의 진의(眞意)가 곡해될 여지가 있다.
Invest Column
인베스트조선 유료서비스 2023년 10월 30일 13:47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