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 자본시장 고민은 2년간 누적된 '파이프라인' 해소
입력 23.12.14 07:00
2022년 이후 자본시장 침체 분위기 지속
일감 자랑하던 IB들, 거래 지연에 울상
미룰수록 난이도↑…"내년엔 움직여야"
다만 내년 거래 환경 개선될지는 미지수
  • 내년 자본시장의 화두는 오랜 기간 묵 거래들을 어떻게 해소하느냐가 될 전망이다. 팬데믹 유동성 장세가 끝난 후 여러 이유로 표류하는 거래들이 늘었고 이는 시장의 역동성 저하로 이어졌다. 기업이든 투자사든 거래 당사자 입장에선 소득없이 시간이 끌리는 게 달가울 리 없다. 투자은행(IB)에도 차곡차곡 쌓이기만 하는 딜 파이프라인을 실행하라는 압박이 커질 것으로 보인다.

    한국 자본시장은 2021년 유동성 장세에 힘입어 유례없는 대호황을 누렸지만 이듬해 분위기가 급반전했다. 세계적인 유동성 긴축이 시작되며 기업과 투자자에 흘러가는 돈줄이 막혔고, 거래 기근으로 이어졌다. 2021년 호황을 기본 전제로 2022년에 시작하려던 거래들은 대거 발이 묶였다. 올해도 경기 반등에 실패하며 2년째 침체 분위기가 이어졌다.

    특히 대형 거래들의 난맥상이 장기화하는 모습이다. 막대한 자금이 들어갔다 보니 섣불리 움직일 수 없고, 손실을 감수하긴 더더욱 어렵기 때문이다. 대형 거래들이 잇따라 좌초하는 상황에선 좋은 시기를 기다리는 외엔 별다른 택지가 없었다. ‘실패한 거래’라는 주홍글씨가 무섭다 보니 시장에 나서면서도 ‘분위기를 살핀다’는 정도로 의미를 축소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 IB들의 고민은 점점 깊어지고 있다. 주로 M&A와 주식자본시장(ECM) 관련 거래에서 돈을 버는데 두 시장 모두 침체 국면이 이어지고 있다. 상장(IPO)과 M&A 중 어느 전략이 유리한가를 두고 고민한들 묘수가 나타나지 않는 상황이다. 고객도 주관사를 교체하거나, 맨데이트 기간을 늘려주는 것 외엔 별다른 방도가 없다.

    예전이면 IB끼리 서로 부러워했을 대형 거래의 주선권이 이제는 부담이 되는 형국다. M&A, 상장, 블록세일 등 거래가 실제 성과로 이어지는 것은 많지 않다. 플랫폼처럼 헤게모니에서 멀어진 산업은 시작할 엄두를 내기 어렵고, 될 만한 거래도 주판알을 튀기느라 차일피일 늦어지고 있다. 2021년 하반기 기세 좋게 추진했던 거래는, 다음달이면 4년차로 접어든다. 승진 잔치는커녕 본사에서 눈치를 주지 않을까 걱정해야 할 처지다. 성사되는 거래가 많지 않아도 수임은 이어가야 한다.

    회계법인이나 법무법인 등 시장 참여자들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자문하고 있거나 자문권을 가진 거래가 여러 해에 걸쳐도 끝을 맺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자연히 자문 부문에서 돈을 벌기 어렵고 분위기도 살풍경하다. 작년 정도 실적은 낼 것이라 태연한 모습들이지만 연말로 갈수록 자문료를 미리 받아와야 한다는 압박이 커지는 분위기다.

    고객이든 IB든 시장 상황을 이유로 거래를 무한정 미룰 수는 없다. 2년 내내 재무압박에 시달린 기업들은 사업부 매각이나 상장 등 미뤄둔 계획을 실행해야 한다. 경영 환경이 악화할수록 비핵심 자산을 팔아야 한다는 압박도 심해진다. 기존에 중책을 맡았던 임원이든 새로 임무를 부여받은 임원이든 부담은 클 수밖에 없다. 일부 기업 임원들은 ‘내년엔 움직여야 한다’며 정기인사 전부터 자문사를 채근하기도 했다.

    사모펀드(PEF) 역시 회수 성과를 내오라는 투자자들의 압박을 강하게 받고 있다. 중요 포트폴리오일수록 신중하게 전략을 짜야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회수 장벽은 높아지고 기대수익률은 낮아질 수밖에 없다. 상장과 매각이 어렵다면 소수지분 매각, 자본재구조화 등 가능한 안을 최대한 구상해야 한다.

    한 외국계 IB 관계자는 “현재 확보하고 있는 딜 파이프라인은 모두 좋은 것들이지지만 수월하게 진행되는 상황은 아니다”며 “거래를 계속 미루다간 본사의 압박이 커질 수 있기 때문에 내년엔 파이프라인을 해소하는 것이 중요 과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내년이 주요 거래들에 있어 중요한 분수령이 될 것으로 보이지만, 시장 환경이 얼마나 우호적일지는 미지수다. 완만한 경기 개선세가 나타날 것이란 전망이 많지만 두드러진 변화로 이어질 가능성은 불투명하다.

    오히려 국내 경기는 부채 증가, 구조조정 등 지금까지 미뤄둔 부담도 크다는 평가가 나온다. 금리 상승세가 둔화하더라도 고금리 환경은 당분간 이어질 것이란 예상이 많다. 기업과 투자사들이 미뤄둔 숙제를 풀기 위해 일제히 움직이면 병목 현상이 발생할 수도 있다.

    한 거래라도 생각이 다른 이해관계자가 많아지는 추세다. PEF 관련 거래에선 운용사(GP)와 출자자(LP)의 입장이 다른 경우가 많다. 대기업 거래에선 지배주주와 이사회, 내부 임원 등 이해가 복잡하게 얽혀 있다. 거래 자문사 입장에선 이런 실타래를 풀 묘수까지 찾아야 한다.

    한 M&A 자문사 관계자는 “대기업 상장사 분할 및 투자유치 거래 맨데이트를 2년째 가지고 있는데 사외이사의 입김, 임원들 내부 정치, 오너일가의 고민 등 장벽이 많다”며 “최근 거래가 조금 진척됐는데 시장 분위기가 예상보다 우호적이다 보니 오히려 또 장고에 들어가며 지연되고 있다” 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