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 엄격해진 금융사들...EOD 압력 커질 인수금융 시장
입력 23.12.21 07:00
경기 부진 장기화에 차주·기업 상환 부담 커져
극단 상황 부담스럽지만 개선 가능성도 불투명
EOD 늘 것이란 우려…금융사도 양보 어려울 듯
  • 인수금융 시장은 한동안 금융사 투자부서의 중요 먹거리 중 하나였다. M&A 시장이 점점 커지고 유동성도 많은 상황에선 주식을 담보로 돈을 빌려주는 영업 방식의 안정성이 높았다. 일을 따내기 위한 경쟁은 있었지만 기한이익상실(EOD)을 걱정하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인수금융 시장을 주도하는 대형 은행과 증권사들은 사고가 나서 구설에 오르는 것을 특히 꺼린다. 대주단 안에서 책임 공방을 하는 경우는 왕왕 있지만 결국은 극단적 상황은 피하는 경우가 많았다. 한동안 실제 EOD 사례도 2014년 보고펀드의 LG실트론 인수금융 정도에 그친다.

    유동성 긴축 환경이 장기화하며 인수금융 시장에서도 돈을 떼일 수 있다는 우려가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경기 부진에 금리 상승, 실적 및 주가 저하 등 악재가 이어지며 재무약정(Covenant)을 지키기 어려운 차주가 많아졌다. 대출 경쟁 속에 낮은 이자율, 높은 담보인정비율(LTV)을 감수했던 금융사들의 부담이 커지고 있다.

    작년 하반기 IMM PE의 에이블씨엔씨(미샤) 인수금융은 대주단 한 곳이 반대하며 EOD가 발생했다. 올해 실적 개선으로 EOD 상태를 해소하는 이례적인 성과를 내기도 했다. 작년말엔 어피너티에쿼티파트너스의 락앤락 인수금융 만기가 논란 끝에 연장됐다. 일부 대주단엔 EOD를 내주면 돈을 대신 갚아주겠다는 제안이 가기도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 후 1년이 지났지만 시장 상황은 개선되지 않았고 기업들의 부담은 점점 누적되고 있다. 기업을 자산으로 돈을 빌린 곳들의 부담이 커질 수밖에 없다. 차주나 기업의 규모가 작을수록 체감 분위기가 싸늘하다. 금융사 사이에서도 자사나 경쟁사 포트폴리오에서 EOD 사례가 발생하지 않을까 촉각을 기울이는 모습이다.

    한 사모펀드(PEF)는 지난 1분기 제조사 포트폴리오 인수금융 만기를 올해 연말까지로 수개월 연장했다. 실적 부진으로 인수금융 상환 부담이 커졌고, 사실상 회사 M&A를 위한 시간만 준 것으로 풀이된다. 다만 이달까지 매각하긴 쉽지 않고, EOD가 발생할 가능성이 거론된다. 대주단은 일부 상환, 금리 상향 등 조건으로 연장을 검토하고 있지만 합의를 도출하기 쉽지 않은 상황이다.

    한 대형 PEF가 투자한 플랫폼 관련 기업도 대기업의 시장 참여로 영업 환경이 악화했다. 역시 일찌감치 매각을 검토했으나 원매자를 찾기 쉽지 않은 상황이다. 한 중견 PEF가 몇 년 전 투자한 제조사는 팬데믹 이후 적자 규모가 확대되며 인수금융 재무약정 위반 압박이 커지는 것으로 알려졌다. 기업이 인수한 식음료 기업 인수금융도 연체 중이란 소문이 돌고 있다.

    카카오그룹은 올해 창사 이래 가장 큰 위기를 겪고 있다. 카카오뱅크, 카카오엔터테인먼트 등에 투자한 사모펀드(PEF)와 그에 돈을 빌려준 금융사의 고심이 깊은 상황이다. 일부 금융사에선 카카오가 ‘금기어’처럼 받아들여지는 분위기다. 당장 상환 압박까진 이어지지 않더라도 향후 차환(리파이낸싱) 때는 파열음이 발생할 가능성도 있다.

    기업들이 과거처럼 차주의 편의를 봐주기는 쉽지 않은 환경이 됐다. 차주의 여력이 있는 곳이라면 추가 출자나 일부 상환 등 협의를 통해 만기연장이나 차환을 꾀할 수 있지만, 작은 곳에 대해서는 그런 기대를 갖기 어렵다. 이 때문에 일부 EOD 발생 자산은 잔여 대출금 수준의 금액만 나오면 바로 팔아버리는 사례도 나오고 있다.

    금융사 전반의 분위기는 날카로워졌다. 연체나 EOD 상황이 부담스러운 것은 여전하지만, 당장 피한다고 나중에 두드러진 상황 개선이 나타날 가능성은 크지 않다. 일부 대형 금융사는 관련 부서 물갈이 인사를 단행했고, 일부는 어차피 큰 돈이 되지 않는다며 조직을 상당부분 축소하기도 했다. 이전 담당자의 자산에서 문제가 생긴다면 털고 가야한다는 목소리가 나올 수도 있다.

    한 금융사 관계자는 “인수금융에서 연체나 EOD 상황이 발생하면 실무진의 부담이 클 수밖에 없다”며 “그렇더라도 예전처럼 대주가 적극적으로 나서 불을 끄려 움직이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