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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자 시장의 침체가 장기화함에 따라 언제 돌발상황이 발생할지 모른다는 긴장감도 계속되고 있다. 장이 좋을 때는 서로 신뢰를 깨버렸다는 ‘기분’ 문제로 다투는 일이 많았다면, 이제는 약속 이행 여부에 따라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사례들이 늘고 있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마련한 장치가 기능하지 못하는 사례도 나타나면서 ‘만약의 만약’까지 대비해야 한다는 고민도 깊어지는 분위기다.
과거 M&A와 투자를 두고 벌어지는 분쟁이 없지는 않았지만 화제가 되는 경우는 드물었다. 대형 거래의 경우 쟁쟁한 자문사와 법무법인을 써서 의견을 조율하고, 서로 합의한 조건에서 크게 벗어날 가능성도 크지 않았다. 유력 자문사의 조력을 받지 못하는 소형 거래에서야 잡음이 이는 사례가 간혹 있었다.
사모펀드(PEF)가 자본시장의 주력으로 부상한 후에는 갈등을 빚는 사례가 많아졌다. 계약서에 구체적인 권리 관계를 담지 않거나 상대방의 구두 약속을 믿었다가 문제가 커지는 일이 있었다. 유력 PEF들이 두산인프라코어차이나(DICC), 교보생명 등에 투자했다가 애를 먹었다. 정관이나 계약상 문구 해석을 두고 이견을 벌이기도 했다.
신뢰를 저버렸다는 점을 문제 삼거나 자존심 싸움 양상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계약 당시 예측하지 못했던 사정변경이 발생했는데, 계약 담당자들은 달라지는 상황이 빈번하다보니 애초에 계약서를 잘 써야 한다는 지적이 많았다. 변호사의 일감과 수임료가 늘었다.
수년간 자본시장이 침체하며 계약의 중요성이 더 커졌다. 계약을 하고 계약금을 받은 후에도 거래 완결을 자신하기 어려워졌다. 예전엔 이론적으로나 가능했던 사고들이 실제로 발생하면서 거래 당사자들이 신중해졌고, 각종 안전장치를 계약에 담으려는 의지가 더 강해졌다.
대표적인 사례가 11번가다. SK스퀘어는 2018년 재무적투자자(FI)를 유치하며 5년 내 상장을 약속했다. 일정 기간에 어느 정도 수익률을 확보하겠다는 상장 조건(Q-IPO)을 제시하고 이를 달성하지 못할 경우 투자자가 공동매각권(Drag along), 회사가 매수청구권(Call option)을 갖는 구조(Call & Drag)를 짰다.
11번가는 약속한 기한 내에 상장하지 못했다. 상장 가능성이 불투명해지자 FI의 출자자(LP)는 일찌감치 공동매각권을 행사하자는 입장을 정했다. 보통의 경우라면 FI가 회사를 매각하기 전에 콜옵션을 행사해 경영권을 지키려했겠지만 SK스퀘어 이사회는 콜옵션 행사를 포기했다. 콜옵션을 했다간 회사에 해가 되고 배임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굴지의 대기업이 예상과 다른 행보를 보이며 FI의 회수 방도는 모호해졌다. 5년 사이 시장이 예상을 초월해 변했고, 이전에 갖춰둔 안전장치가 무용지물이 됐다.
콘텐츠웨이브도 FI 회수 방안을 고심하고 있다. 상장이 막히며 FI의 전환사채(CB) 투자금을 회사가 돌려줘야 할 가능성이 커졌는데 자금 사정이 마땅치 않다. 예전 같으면 대기업 이름값에 기댄 채권성 투자는 회수 안전성이 보장됐었지만 사업 부진과 유동성 기근 앞에선 무용지물이다. FI는 국내 OTT 통합에 대한 동의권을 갖고 있다지만 이런 상황에선 자금 회수를 낙관하기 어렵다. 회사는 FI에 돈을 챙겨주기 어렵지만, 챙겨줄 돈이 있더라도 이후 생존을 걱정해야 할 처지다.
IMM PE는 작년 상반기 KT클라우드에 투자하면서 KT에 대한 풋옵션(매도청구권)을 확보했다. 자금력 탄탄한 대주주에 지분을 매각할 권리를 가지고 있으면 회수 안정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KT가 무너지는 극단적인 상황만 아니라면 콜옵션 행사 여부에 불확실성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
최근 HMM 매각도 계약 조건을 두고 이견이 있었다. 본입찰 후 계약 조건을 주고 받는 과정에서 형평성 논란이 불거졌다. 애초에 거래의 기본 전제는 확실히 고정한 후 매각 절차를 밟았어야 했다는 지적이 나왔다. 앞으로도 산업은행 등이 HMM 매각 후 언제까지 간섭할 수 있느냐, 하림그룹의 HMM 현금 활용 방악을 어떻게 제어할 것이냐를 두고 갈등이 이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매도자는 배임 논란이 일지 않을지, 인수자는 HMM 인수 후 온전히 사업을 할 수 있을지 걱정해야 할 상황이다.
워낙 거래 확실성이 떨어지고 대내외 변수가 많아지다 보니 웬만큼 유망한 거래가 아니고선 의지를 드러내는 것도 부담스러워 하는 분위기다. 하나금융지주는 KDB생명 인수전에 사실상 유일한 원매자로 얼굴을 드러냈지만 구속력있는 합의에 이르기 전에 발을 뺐다. 일부 거래에선 원매자로 거론된 기업들이 혹시나 발이 묶일까 관심이 없다는 뜻을 적극 드러내기도 했다.
기업 M&A는 물론 부동산 등 거래에서도 계약서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 이전에는 일시적인 유동성 절벽, 차환 고민 등은 서로 양해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이제는 분위기가 다르다. 정부가 나서 중재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계약서에 적힌대로 발빠르게 실행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기류가 엿보인다. 사업성이 떨어지는 거래에 대래 ‘계약 해지’하거나 ‘경매’ 등 계약상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지 변호사에 자문을 요청하는 사례가 많아지고 있다.
한 M&A 자문사 관계자는 “과거의 갈등 사례가 쌓이며 계약서가 꼼꼼해졌지만 자본시장의 불황이 장기화하면서 예전에 맺은 계약이 힘을 쓰지 못하는 경우도 많아졌다”며 “예측하기 어려웠던 상황이 현실로 벌어지는 사례가 나타나는 만큼 계약서에 만약의 경우를 대비한 장치들을 꼼꼼히 넣으려는 경향이 강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거래 계약상 문제 불거지는 사례 드물었지만
시장 침체 길어지며 계약서 힘 못쓰는 경우도
서로 어려운 상황…계약에 생존 엇갈릴 수도
예측불가 환경에 계약서 작성 더 꼼꼼해질 듯
시장 침체 길어지며 계약서 힘 못쓰는 경우도
서로 어려운 상황…계약에 생존 엇갈릴 수도
예측불가 환경에 계약서 작성 더 꼼꼼해질 듯
인베스트조선 유료서비스 2023년 12월 26일 07:00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