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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故)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은 "우리나라 정치는 4류, 관료는 3류, 기업은 2류(1995년, 베이징 특파원 간담회)"라고 했다.
이건희 회장이 작고한 지 3년 그 이전부터 삼성은 이미 글로벌 1류 기업으로 자리 잡았지만 아직도 대한민국의 정치를 1류로 표현하는 이는 찾아보기 어렵다.
삼성은 애초에 정치와 거리가 멀었다. 삼성 최고경영자(CEO) 출신 국회의원은 없다. 고졸 출신 첫 삼성 여성임원 양향자 의원이 현직에 있지만 삼성을 대표하는 인사로 보긴 어렵다.
삼성이 일류 기업으로 거듭나기까진 수 많은 전문경영인들의 손을 거쳤다. 이름만 대면 삼성이 떠오르는 '파란 피'의 기업인들에게 정치권의 러브콜이 없었을 리 만무하다.
선대 회장과 함께 초격차 기술을 지향하며 삼성전자를 한땀한땀 키워낸 기업인들은 정치의 주인공이 되려 하지 않았다. 삼성을 떠나선 후진을 양성하거나(권오현 전 삼성종합기술원 회장), 기술자의 이력으로 그룹의 수장이 되거나(황창규 전 KT 회장), 여전히 기술자로 남아 저명한 투자자(진대제 스카이레이크인베스트먼트 회장)가 됐다. 물론 이들에 대한 평가는 보는 이들에 따라 엇갈리는 게 사실이지만, 이들의 행보에선 최소한 삼성을 초격차 기업으로 이끈 기술자로서 무게감을 느낄 수 있다.
이들이 정치권과 거리를 뒀던 것은 초일류 기업가로서의 자부심, 삼성그룹 CEO란 인생 최고 경력을 달성한 이들의 자존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이건희 회장이 정치를 4류로 표현한 것과 같은 생각이었을지 모른다.
국정농단 사태로 인해 삼성이 정치에 휘말린 지 8년. 이재용 회장은 두 차례나 구속수감됐었고, 여전히 사법리스크는 여전히 남아있다. 이재용 회장이 자리를 비운 동안 삼성은 사실상 전문 경영인에 손에 맡겨졌다. 그 결과 삼성그룹의 투자 시계는 멈췄고, 지배구조개편, 대규모 M&A 등 전략적 의사결정 기능이 사라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문 경영인들은 승승장구할 수 있었다. 이 시대를 대표한 김기남, 김현석, 고동진 전 사장 등 3인방은 이재용 회장이 없는 삼성에서 사실상 대체할 인물을 찾기 어려웠다. 기술자로서, 경영인으로서 능력의 뛰어남과 부족함에 대한 평가를 떠나 삼성 자체적으로 대대적 인사를 단행할 여력조차 없었다.
고 전 사장이 정치에 입문하는 배경과 "고 전 사장이 국회의원이 되면" 등 이후를 내다보는 이들이 많다. 고 전 사장이 삼성전자와 정치권의 가교역할을 하고, 정풍의 바람막이가 될 것이란 기대감이 나오는 것도 사실이다. 글로벌 반도체 1위 기업 삼성전자가 정치권과의 연줄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가 안타깝다.
은퇴한 기업인의 행보에 평가를 내리긴 어렵다. 고 전 사장 개인적으로 삼성전자 전 CEO란 경력보다 금뱃지가 이력서 마지막 줄에 더 어울린다고 판단한 것은, 삼성의 바뀐 위상과 현재의 상황을 비쳐주는 듯 하다.
취재노트
인베스트조선 유료서비스 2024년 01월 22일 11:32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