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준공에 발목 잡힌 신탁사들…'우량' 평가받던 '서울 사업장'도 자체 자금 투입
입력 24.02.02 07:00
지역 막론하고 PF 부실화 위험 본격화
KB부동산신탁, 단기차입금 한도 약 1조로 늘려
고유자금 부족한 신탁사, 손해배상 소송 휘말려
  • 책임준공형 관리형 개발신탁(책준형)은 점차 위기가 현실화하고 있다. 상대적으로 견고하다 평가받던 서울 사업장마저 문제가 생겨 신탁사의 자체 자금(신탁계정대)이 투입되는 사례도 나타나고 있다.

    A신탁사는 최근 서울 소재 한 사업장에 신탁계정대에서 공사비를 투입한 것으로 전해진다. 작년 말부터 지방 사업장에 자체 자금을 투입한 사례는 늘고 있지만, 서울 사례는 이례적이라는 평가다. PF 부실화 위험이 수도권과 비수도권을 막론하고 커지고 있다는 분석이다.

    일반적인 상황에서 책준형 상품에서 신탁계정대가 투입될 가능성은 크지 않다. 그러나 시공사가 책임준공 의무를 지키지 못해 사업리스크가 현실화하는 경우 신탁사는 책임준공 의무를 지키기 위해 대체시공사를 선정하거나 신탁계정대를 투입해 대응한다. 계획 공정률보다 실제 공정률이 미달하는 사업장에 신탁사가 자체 자금을 사용할 수밖에 없는 '고육지책'의 상황인 셈이다.

    KB부동산신탁은 작년부터 단기차입금 한도를 늘리고 있다. 지난해 5월과 7월, 두차례에 걸쳐 단기차입금 한도를 3200억원까지 늘렸다. 업계에 따르면 최근 한도를 9000억원까지 늘린 것으로 알려졌다. 차입형 토지신탁 사업장뿐 아니라 책준형 사업장에서 부실 위험이 커지며 추가 사업비 투입이 이뤄지는 영향이다.

    이마저도 신탁계정대를 투입할 능력이 있는 신탁사만 가능한 전략이다. 고유자금이 부족한 신탁사의 경우 미완공 사업장을 부도 처리할 수밖에 없는 처지다. B신탁사 등은 손해배상소송에 휘말리는 경우도 많은 것으로 전해진다.

  • 책임준공형 관리형 개발신탁의 위험성은 작년 초부터 꾸준히 제기됐다.

    한국신용평가는 작년 2월 '시공사 부실위험이 부동산신탁사로 전이될 경우 위험 수준 및 대응력' 리포트를 통해 ▲보유 자기자본 대비 크게 노출된 사업규모 ▲계획 대비 지연되는 공정률 ▲개발사업 참여 시공사의 열위한 시공능력 ▲저조한 분양 성과 ▲개발 중인 부동산 유형 고려 시, 높은 미분양 위험 등을 핵심 위험 요인으로 꼽았다.

    여윤기 한국신용평가 연구원은 "위기 상황에서의 위험은 책준형 상품이 높을 것으로 예상한다"며 "자기자본 대비 노출된 사업규모가 크고 다수의 이해관계자가 존재하며, 해당 상품에 대한 위험사례 및 위험수준에 대한 경험이 충분히 쌓이지 않았기 때문이다"고 밝혔다.

    언제 문제가 생겨도 이상하지 않을 PF 시장이었지만 지난해는 예상외로 잠잠했다.

    부동산 연착륙을 꾀하려는 정부의 적극적인 개입이 배경으로 꼽힌다. PF 시장의 경색을 막기 위해 정부는 수십 건의 대책을 쏟아냈다. 금융당국은 은행·증권사 등 사실상 모든 금융기관을 내세워 PF 시장에 직간접적으로 유동성을 공급했다.

    2016년 책준형 상품이 등장한 이후 신탁사의 책준형 미이행 사례가 단 한 번도 없었으나 작년부터 실패 사례가 늘고 있다. 

    건설산업연구원·대한건설협회가 시공능력 40위~600위 건설사를 대상으로 '신탁사 참여 PF 사업장 현황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신탁사가 채무인수 약정을 체결한 사업장 62곳 중 35곳에서 작년 8월 기준 채무인수가 발생했거나 ▲향후 3~6개월 내 채무인수가 발생할 것이라고 답했다.

    시공사가 준공 기한을 지키지 못해 신탁사로 부담이 전이되는 사례는 점차 늘어날 전망이다. 이미 부실한 중소형 건설사가 연이어 도산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몇 년간 자체 신용으로 자금 조달이 어려운 중소형 건설사일수록 신탁사의 도움으로 사업을 진행한 경우가 많았다. 

    한국건설산업연구원에 따르면 지난해 종합건설기업 폐업 공고 건수는 581건으로 전년 362건 대비 60% 증가했다. 2005년 629건 이후 18년 만의 최대치다.

    부동산 업계 한 관계자는 "부동산 호황기 때 다수 진행했던 책준형 사업장의 만기 기한이 올해 다수 다가와 신탁계정대 투입 사례는 점차 늘 전망이다"며 "중소형 건설사가 부도날 경우 신탁사가 PF 채무를 떠안게 돼 우발채무로 잡히는 문제도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