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나갈 땐 모르쇠더니"…기업금융-부동산 실적 목표 미루기 갈등
입력 24.02.23 07:00
취재노트
부서별 수익 목표 배분 시즌…부서 임원간 파워게임 시작?
부동산 부서 앓는 소리에 시선 곱지 않은 기업금융 직원들
"부동산 시장 침체 반영해야" vs. "중소기업 연체율 곤란"
성과급 축소 우려에…부동산금융→기업금융 인력 이동도
  • 금융지주나 대형 금융사들은 매년 초 그 해의 수익 목표치를 설정한다. '버짓(budget)'이라 불리는 이 목표치는 통상 경제성장률이나 물가상승률 등 경제 관련 지표들과 시장 상황을 반영해 산출한다. 금융사 전체 버짓이 정해지면 이후 각 사업 부서와 임원들이 세부 조율 과정을 거치게 된다.

    보통은 높은 목표치를 받길 원하지 않는다. 버짓이 많으면 달성 난이도가 올라가고 심리적 압박도 커진다. 무엇보다 성과급 규모에서도 차이가 날 수 있다. 버짓 달성률은 금융사 성과급 산정에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기도 하다.

    물론 시장 상황이 좋을 때는 약간의 버짓 증감이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약속된 내부 방식에 따라 선정되는 버짓에 이견을 제기하기 부담스러운 데다, 열심히 하는 만큼 버짓을 채울 가능성도 컸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처럼 자본시장의 침체가 장기화하는 상황에선 어느 부서할 것 없이 버짓을 얼마나 받느냐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 전체 목표에서 한 부서가 받는 목표치가 줄어들면 그만큼 더 받아가야 하는 곳이 반발할 수 있다.

    특히 투자 영역의 핵심인 부동산금융과 기업금융 사이에서 냉기가 감지되고 있다.

    한 대형 금융사 부동산금융 부서에서는 국내 부동산 시장 침체를 이유로 수익 목표치를 낮춰달라는 목소리를 냈다. 작년에 부동산 거래가 씨가 마른 것은 주지의 사실이었고, 올해도 상황이 크게 개선되기 어렵다는 전망이 많으니 타당한 면이 있는 요구다. 나중을 위해 조직을 유지하려면, 그만한 '배려'도 필요한 상황이다.

    기업금융 부서는 불편한 기색이다. 올해 시중은행과 대형 증권사들은 주요 건설사의 프로젝트파이낸싱(PF) 펀드 출자나 사업장 보증 등 금융 지원을 늘릴 예정이다. 정부 압박에 어쩔 수 없이 움직이는 면도 있지만 어쨌든 이자나 수수료 수익은 남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무엇보다 지난 수년간 부동산 부문은 호황을 누렸다. '땅 짚고 헤엄치는' 식의 영업을 많이 했는데, 그렇다고 실적을 적극적으로 더 받지는 않았을 것이다. 기업금융 쪽에선 '좋을 때는 가만히 있더니…'란 생각이 들 만도 하다. 부동산보다 낫다지만 기업금융 쪽도 부진하긴 마찬가지다 보니 기업금융 버짓을 줄여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부동산 부서는 시장 상황을 감안해 버짓을 줄여달라 하지만, 기업금융 쪽에서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부동산금융 부서들이 성과급 대부분을 독식해온 증권업계에선 부서간 갈등의 골이 더욱 깊다. 기업금융 쪽에선 한 거래를 두고 출혈 경쟁이나 쪼개기 수임을 해서 돈을 벌었는데, 부동산 쪽에선 쏟아지는 거래에 참여만 해도 막대한 이익을 거두고 성과급이 쏟아졌다. 부동산 시장이 급격히 경색되면서 토지만 사둔 사업이나 본PF 전 브릿지론 단계에 묶인 증권사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최근 증권가에선 부동산 전문 인력들이 상대적으로 온기가 도는 것으로 보이는 기업금융 쪽으로 이동하는 사례도 나타나고 있다. 그동안 증권사 자원을 독식했던 '부동산 시대'가 저물고, 기업 회사채 발행이나 인수금융 등을 수익원으로 삼아야 한다는 인식이 커지면서 이런 인력 이동 사례가 더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기업금융과 부동산금융 부서간 갈등은 경제 사이클에 따라 2~3년에 한 번씩은 반복됐던 일"이라며 "할당 목표치에 대한 임원들의 논리가 버짓에 미치는 영향도 일부 있어, 각 임원들이 파워게임을 벌이기도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