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그룹 이혼소송, 자금 마련보다 3심 대응이 우선…로펌들 '총수 일감' 수임 총력전
입력 24.06.05 07:00
이례적 언급 속 노소영 勝, 최태원 회장은 김앤장 업고 패
재산분할 규모보다 비자금·정경유착 등 프레임이 더 부담
'대형 사고'난 SK그룹, 대법원에서 명예회복 총력전 펼 듯
대형 로펌들, 2심 결과 틈타 SK 변호 수임 위해 물밑 경쟁
실적 방어 어려운 로펌 수장들, 쏟아질 SK발 먹거리 기대
  • 최태원 SK그룹 회장과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의 이혼 소송 2심 결과는 시장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조단위 재산분할 규모도 이례적이었지만 법원이 비자금과 정경유착을 통한 재산 형성을 인정했다는 충격파가 더 컸다. SK그룹과 최태원 회장 입장에서는 '무엇을 팔아 돈을 마련하느냐'보다 대법원에서 2심의 논리 구성을 어떻게 깨느냐가 더 시급한 과제로 떠올랐다.

    대형 법무법인들도 2심 이후 어수선한 틈을 타 최태원 회장 측 변호를 수임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다. 기존 변호인단의 전략이 다소 안일했다며 여러 경로를 통해 SK그룹 측에 접촉하고 있다. 총수 일감을 따낼 경우 향후 쏟아져 나올 SK그룹 발 거래 자문에서도 주도적인 위치에 설 수 있기 때문에 각 법무법인 경영진이 총력전을 펴는 양상이다.

    지난달 진행된 이혼 소송 2심은 노소영 관장이 승리했다. 재산분할이나 위자료 모두 가사 소송에선 이례적이란 평이 따랐는데, 결과보다 시선을 모은 것은 판결 논리였다. 재판부는 노태우 전 대통령이 조성한 비자금이 SK그룹의 급성장에 기여했다는 취지의 판단을 내놨다. SK그룹의 이동통신 사업이 성공하는 데도 양가의 인척 관계가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봤다.

    금기시되던 비자금과 정경유착 프레임이 판결문에 담긴 셈이다. 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호와 영향력이 SK그룹의 성장에 기여했으니 딸인 노소영 관장이 수혜를 입어도 된다는 논리로 볼 여지가 있다. 노 관장이 심리 막판 꺼내든 ‘비자금 카드’가 먹힌 양상이다. 다만 그렇더라도 노 관장이 그 과실을 수취할 자격이 있다 보기는 어렵다는 지적이 있다.

    한 투자업계 관계자는 “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자금이 SK그룹을 키웠다 하더라도 그 과실은 노소영 관장이 아니라 그 기회를 받지 못한 일반 투자자에 돌아가는 것이 맞다”며 “최태원 회장은 계열사 지원을 받은 SK C&C를 활용해 SK㈜ 지배력을 키웠는데 이렇게 늘어난 기업가치를 노 관장에 나눠 준다는 것도 이치에 맞지 않다”고 말했다.

    재산분할 규모가 1조원대로 극히 이례적이긴 하지만 그정도로 SK그룹 전체가 흔들릴 것이라는 시각은 많지 않다. SK실트론 등을 활용하면 SK㈜의 지배력 약화를 최소화하며 자금을 마련할 수 있다는 평가도 있다. 2심처럼 판결이 확정되더라도 실제 돈이 필요한 시점은 몇 년 후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최태원 회장이 향후 어떻게 자금을 조달할 것이냐보다, 이번 판결이 잘못됐다는 명분을 먼저 살리는 것이 중요해졌다. 이는 재산분할 등 경제적인 부담을 줄이는 것이기도 하지만 최태원 회장이 총수로서 그룹을 이끌 소양이 있느냐를 입증한다는 의미도 있다. 최창원 SK수펙스추구협의회 의장이 그룹을 잘 이끌고 있는 상황에선 '대형 사고'가 난 최태원 회장의 입지가 모호해질 수밖에 없다. 최 회장은 SK가 성장해 온 역사를 부정했다며 2심 판결에 유감을 표했다.

    대법원은 통상 가사 소송에서 2심의 판단을 최대한 존중하는 경향을 보인다. 사실관계만 어느 정도 확인되면 법률심인 상고심에서는 다툴 것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이번엔 주식이 분할 재산에 포함해야 한다고 보는 쪽에서도 놀랄 만큼 파격적인 면이 있었다. 반박 논리를 꼼꼼하게 풀어내면 대법원도 전향적인 판단을 내리지 않겠느냐는 예상이 있다.

    최태원 회장 측 변호 전략이 중요해졌다. 최 회장은 1위 김앤장법률사무소를 포함 10위권의 로고스, 강금실 전 법무부 장관이 이끄는 원 등으로 호화 변호인단을 구축했다. 그러나 김기정 변호사(율우), 김수정 변호사(리우) 등 부티크 로펌 전관들에 고배를 마셨다. 결과론적이지만 최 회장 측 변호인단의 대응 전략이 다소 안일했던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이번 소송은 최태원 회장에 대한 대중의 시선이 곱지 않은 상황에서 진행됐다. 재판부도 최 회장 측에 석명권(당사자에게 질문하고 입증을 촉구하는 권한)을 행사하는 과정에서 다소 엄격한 인식을 드러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를 감안하면 '반성의 기미'를 드러내는 전략이 나았을 수 있지만 자문단은 고객의 마음을 살피는 데만 집중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항상 강자 편에 서는 김앤장의 이미지도 이번엔 큰 득이 되지 않았을 것이란 평가다.

    노소영 관장이 조단위 재산 분할을 요구한 만큼, 인정 비율이 살짝만 높아져도 최태원 회장의 부담이 기하급수적으로 커질 수 있었다. 변호인단은 이를 적극 염두에 뒀어야 했는데, 2심 결과를 1심처럼 낙관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다. 변호인단은 재판 후 '기업의 역사와 미래를 흔드는 판결'이라며 유감을 표했는데 이 역시 성급했다는 시선이 없지 않았다.

    김앤장의 강력한 네트워크와 자문 역량으로 전형적인 민·형사 사건에서 압도적인 성과를 내고 있다. 다만 이런 강점은 '하느님 오른 쪽에 판사가 앉아 있다'고 할 정도로 판사의 판단이 절대적인 가사 소송에서는 빛을 발하기 쉽지 않다. 김앤장은 하이브-어도어 분쟁에서도 하이브 편에 섰다가 체면을 구겼다. 정형화된 자문엔 강하지만 돌발 변수엔 약한 것 아니냐는 인상을 남겼다.

    한 대형 법무법인 경영진 변호사는 "최태원 회장 측 변호인단은 항상 잘 되고 있으니 걱정 말라는 입장을 보였지만 좋지 않은 결과가 났다"며 "걸린 금액이 큰 만큼 그 비율이 조금만 달라져도 영향이 커질 수 있다는 점을 더 신중하게 챙겼어야 했다"고 말했다.

    김앤장은 '명예 회복'을 위해 총력전을 펼칠 것으로 예상된다. 소송 중 재판부가 바뀌어 '소신 있는' 판사가 담당하게 되는 등 변수가 없지 않았지만, 결과가 성에 차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다른 대형 법무법인들도 이 틈을 타 최태원 회장 측 변호를 맡을 수 있을지 물밑에서 기회를 노리고 있다. 광장, 태평양, 율촌을 위시한 대형사들은 거의 대부분 수임 관련 팀을 꾸렸고, 고문과 전관들을 총동원해 정재헌 SK수펙스 거버넌스위원장 등 요인들을 접촉하려 하고 있다.

    통상 ‘총수’ 일감은 그 자체로는 당장 큰돈은 되지 않고 실패 시 위험 부담도 크다. 다만 성공하면 이후 계열사 자문이나 송무 등 일감을 몰아 받아 이익을 보전받을 수 있다. 대형 법무법인이 첫 손에 꼽는 일감인데 지난 수년간은 큰 건이 없었다. 특히 지금처럼 자문 부문의 성과가 부진할 때는 더더욱 놓칠 수 없는 기회다. SK그룹은 앞으로 사업조정 움직임이 본격화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번 기회를 잘 잡으면 법무법인은 매년 적어도 수백억원의 고정 매출을 확보할 수 있다.

    광장은 전통적으로 SK그룹과 관계가 좋았다. 태평양은 LG-SK 배터리 갈등 후 벌어진 SK그룹과 관계를 봉합해가는 구간이다. 율촌은 강력한 대관라인을 바탕으로 대기업 총수 관련 자문에서 성과를 내고 있다. 노소영 관장 측 자문사로 알려진 세종은 노 관장 측 변호를 맡지 않았다는 입장이다. 이들 법무법인은 최근 수뇌부가 바뀌었거나 바뀔 예정이라 실적에 대한 고민이 크다.

    워낙 민감한 사안이니 대형 법무법인 경영진 입장에선 구성원들의 '입단속'에도 신경을 써야 할 상황이다. 과거 한 대형 법무법인 경영진은 기업 총수에 대한 사면권은 신중하게 행사해야 한다는 기고를 냈다가, 해당 그룹으로부터 '출입금지'를 당하기도 했다. 법무법인 구성원이 행여 말실수를 했다간 그대로 수임 기회가 날아갈 수밖에 없다.

    다른 대형 법무법인 경영진 변호사는 “최태원 회장이 눈총을 받는 입장이었고, 재판부가 석명권을 행사해 성향을 드러냈음에도 기존 변호인단이 안일하게 대응한 면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며 “상고심에서 법리 오해, 사실관계 오해 등 문제는 다툴 만하니 대형 법무법인들 전부 기를 쓰고 수임하려 달려들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