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F 전략이 베끼기뿐? '사활' 걸었다면서 '고민' 없는 운용사들
입력 24.06.20 07:00
"상반기에만 30조 유입된 ETF 시장 잡아라"…운용사들 '사활'
패스트팔로워 전략으로 점유율 확대 '급급'…베끼기 기조 만연
상장 종목 개수만 800개 넘고, 쏠림 심해 차별화 어렵다지만
"이 큰 시장에 전략 부재가 말이 되나"…인력 영입도 한숨 나와
  •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상장지수펀드(ETF) 시장인데, 막상 제대로 된 성장 전략을 내놓은 운용사는 전무하다. 대부분의 운용사들이 이렇다 할 전략이 없는 가운데 베끼기를 통해 트렌드 따라가기에만 급급하는 지적이 나온다. 

    패스트팔로워(선두기업이 내놓는 제품이나 서비스를 신속하게 모방해 출시하는 것) 전략으로 점유율 등락을 거듭하지만, 언젠간 한계에 이르진 않을지 고민하는 모습이 관찰된다. 

    19일 금융권에 따르면 최근 한국투자운용 내부에선 커버드콜 ETF를 두고 불안한 심리가 감지되고 있다. 한국투자운용이 ACE 15% 프리미엄분배 시리즈 커버드콜 ETF를 먼저 출시했음에도, 삼성운용이 뒤늦게 낸 미국 AI테크 TOP10+15% 프리미엄 ETF의 기세에 밀리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투자운용 역시 미래에셋자산운용이 선점한 커버드콜 ETF를 빠르게 추종한 덕에 유입액이 늘었는데, 삼성운용이 유사 상품을 내놓으며 우려가 커지고 있는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업계에선 타사 아이디어를 활용해 유사 상품을 내는 '상품 베끼기'의 간격이 짧아지고 있다고 입을 모은다. 이전에는 수개월에서 1년까지 걸리던 기간이 최근엔 1개월까지 단축됐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사례로 비만치료제 ETF가 거론된다. 삼성운용이 KODEX 글로벌비만치료제TOP2 플러스 ETF를 내놓은지 2주가 채 되지 않아 KB자산운용이 KBSTAR 글로벌비만산업TOP2+ ETF를 상장했다. 

    한 운용업계 관계자는 "운용사간 상품 차별화가 의미 없어졌다"라며 "이제는 옛날 일이 됐지만 한 때는 운용사 한 곳에서만 해외지수 ETF를 내기로 합의한 적도 있었다. 지금은 상품베끼기가 만연할 뿐더러 유사 상품 출시 간격도 짧아졌다. 전에는 1년이었다면, 요즘은 반년 혹은 3개월이면 같은 상품이 나온다"고 말했다. 

    금융당국에서 운용사간 과열 경쟁을 두고 해결방안을 고심할 정도다. 금융감독원은 최근 있었던 운용 규제 관련 TF(테스크포스) 회의에서 운용사들에게 경쟁이 과하다는 우려를 전달한 것으로 알려진다. 

    운용업계가 이렇게 ETF 점유율에 사활을 거는 것은 ETF 시장이 운용업계의 마지막 보루이자 수익원인 까닭이다. ETF 자산 규모는 지난 1월부터 5월까지 30조원 가량 늘었는데, 성장속도는 최근 몇년간 더욱 가팔라지고 있다. 지난 2019년말 50조원을 기록했던 ETF 자산 규모는 3년만에 100조원을 넘어섰다. 운용업권의 미래인 셈이다. 

  • 문제는 상품 복제를 통한 패스트팔로워 전략 이외에 마땅한 성장 방안이 부재하다는 점이다. 하나의 트렌드가 굳혀지면 무차별적으로 ETF가 쏟아지는 상황에서 묘수가 없다는게 운용사들의 고민이다. 

    한 대형운용사 운용역은 "개인투자자들의 테마 쏠림 현상도 심해서, 작년에 미래에서 커버드콜 ETF 시장을 일부 선점한 후로 각 운용사가 이를 쫓아가는 형국이다"라며 "패스트팔로워 전략 이외에 마땅한 대안이 없어 고민하는게 운용사의 현실"이라고 말했다. 

    지난 5월 말 기준 상장돼 있는 ETF 종목 수만 868개다. 한달에만 12개의 신규 ETF가 출시된다. 새로운 ETF를 내더라도 다른 상품에 묻히거나 곧이어 유사한 상품이 나와 상품 차별화가 더욱 어렵다는 지적이다. 

    이는 인력과 자본이 부족한 중형 운용사가 또다시 상품 베끼기에 나서는 악순환으로 이어진다. 인재 영입 등의 돌파구를 모색하지만, 그럼에도 불구 마땅한 대안은 나오지 않는 배경으로 풀이된다. 일례로 신한자산운용의 경우 경력자 채용에 돈을 아끼지 않는, 가장 공을 들이는 운용사로 알려져 있지만, 최근 3년내 ETF 점유율 순위는 제자리에 머물고 있다.

    경력자 인력풀도 충분치 않다는 분석이다. ETF 시장이 본격적으로 개인투자자들의 관심을 받은 것은 2010년대 이후로, 뒤늦게 ETF시장에 뛰어든 중형 운용사들은 인력 양성부터 과제란 이야기다. 

    한 투자업계 관계자는 "ETF 시장이 본격적으로 큰 것은 2010년즈음 레버리지 ETF가 많아지면서다. 사실 경력자 인력 풀도 부족하다"라며 "대형 운용사에서 절세에 도움이 되거나 다양한 테마형 ETF를 내놓고 있는데, 타사는 어떻게 하면 인재를 키울 것인가부터 고민하고 있다. 전략을 짜내기가 더욱 어려운 것"이라고 말했다.  

    KB자산운용의 경우 올들어 기존 인력이 대거 이탈하면서 운용역 경쟁력마저 의심받고 있다는 지적이다. 올해 이직한 운용역이 12명인데 새로 채용된 인원 중 9명이 1년차 내외로 전해진다. 한투운용과 격차가 줄면서 발등의 불이 떨어졌다. 타사와의 점유율 격차가 성과지표(KPI)에 반영되기 때문에, 경영진들이 적지 않은 부담을 느끼고 있단 후문이다.

    한투운용도 운용역이 이동 과정에서 생기는 잡음을 피하지 못했다. 지난 4월 한투운용은 KB자산운용으로 옮긴 한 ETF 본부장 관련 비위혐의로 한국투자금융지주로부터 감사를 받았던 것으로 알려진다. 법인카드 사용과 관련해 과다지출을 문제삼았다는 후문이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ETF의 사명을 바꾸는 리브랜딩이 중요해질 수밖에 없는 형국이란 냉소가 나온다. 이름을 바꿔서라도 검색 상위권에 노출되려는 단기적 시각의 전략이 당분간 이어질 거란 전망이다. 한화자산운용과 KB자산운용은 내달 ETF 사명을 바꾸는 리브랜딩에 나설 것으로 전해진다. 

    한 투자업계 관계자는 "ETF시장이 이렇게 빠르게 커지는데도, 운용사들이 경쟁력 있는 전략을 내놓지 못하는 것에 아쉬움이 든다"라며 "상품에 대한 차별화가 어려우니 리브랜딩이라도 하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다른 운용사 관계자는 "절세형 ETF 상품 출시를 위해 3년간 장내파생상품을 운영하는 수준의 장기적 전략과 안목을 갖춘 운용사는 극히 드물고, 그렇기 때문에 해당 운용사의 ETF 점유율이 상승하는 것"이라며 "그 나물에 그 밥 식으로 특정 운용사 출신 인력을 돌려막기 해서는 두각을 나타낼 수 없다"고 꼬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