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그룹에 산업은행이 든든한 뒷배가 될 수 있을까
입력 24.06.28 07:00
취재노트
SK-산은, 산업화부터 해외 확장까지 파트너
배터리 부진 고민 SK, 산은 지원 받을까 주목
산은 사업조정 맡는다면 전방위 압박 불가피
시장에 위기 신호 주고, 체면 하락 가능성도
  • SK그룹은 과거 내수에 기반을 둔 장치산업이 주력이었다. 산업화 시대의 첨병 역할을 한 산업은행과 도움을 주고 받을 일이 많았다. 이런 관계는 SK그룹이 세 손가락 안에 드는 그룹으로 성장한 뒤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산업은행이 정부 시책을 이끌거나 구조조정을 할 때 SK그룹이 힘을 보태거나 원매자로 등장하는 등 여러 영역에서 협력 사례가 이어졌다.

    SK그룹은 2010년대 들어 해외로 눈을 돌렸다. 2012년 산업은행 등과 5000억원 규모 해외 투자 펀드를 결성했다. 지난 수년간은 산업은행의 네트워크와 외화 조달력에 대한 의존도가 더 높아졌다. 해외에 힘을 주려는 산업은행의 기조와도 맞아 떨어졌다. 산업은행 등은 SK하이닉스의 인텔 낸드사업부 인수에 30억달러를 빌려줬고, 각종 해외 설비 투자에서도 금융 지원을 했다.

    SK그룹의 반도체 사업은 고대역폭메모리(HBM)로 반등하기 전까지 고난을 겪었다. 2022년말 삼성전자가 메모리 반도체의 인위적 감산은 없다며 치킨게임에 나섰던 것도 위기였다. 작년 삼성전자가 감산에 동참하며 시장 재고가 줄었고 SK하이닉스도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삼성전자의 결정에는 정부의 의중이 영향을 미쳤는데, 산업은행이 중간에서 의사 조율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SK그룹은 지난 십수년간 경험하지 못한 위기를 마주하고 있다. 가장 큰 원인은 배터리 사업의 부진이다. 주력 계열사 대부분이 배터리 밸류체인으로 들어왔는데 전기차 시장 침체가 이어지며 그룹 전반의 부담이 커졌다. SK의 배터리 사업이 망가지면 한 그룹을 넘어 국가 산업 전반에 충격파가 미치니 정부도 상황을 예의주시하는 분위기다.

    산업은행이 SK그룹의 구원투수로 나서지 않겠느냐는 예측이 나온다. SK그룹이 산업은행 수뇌부를 만나 자금을 요청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산업은행은 일단 선을 그었지만 국책은행과 대기업간 관계에서 불가능한 시나리오는 아니다. 시중은행의 우량 자산 확보 경쟁은 이제 국책은행으로 이어질 분위기다. SK하이닉스의 실적 개선으로 SK그룹 전반의 위험노출액(익스포저)이 줄고 있어 지원 여력도 있다.

    산업은행의 SK그룹 지원 가능성은 충분하지만 어떤 양상을 띨지는 미지수다. 잘 나가는 대기업, 그 든든한 조력자로서의 국책은행 관계일 때는 서로 우호적인 조건을 주고 받으면 되니 고민할 게 많지 않다. 반면 SK그룹의 위기가 예상보다 심각하고 대대적인 수술이 필요한 경우라면 상황은 달라진다.

    SK그룹의 저력이나 보유 자산들을 감안하면 일시적인 배터리 사업 자금 미스매치를 넘어서는 데 큰 어려움이 없을 것이란 시각이 많다. 그러나 자금 조달 장벽은 여전히 높고, 이는 그룹 전체의 위기로 비화할 것이란 우려도 없지는 않다. 최근 다른 대기업과 빅딜, 이종 계열사간 합병 카드들이 거론되는 것도 SK그룹의 급한 사정을 방증한다는 지적이다.

    최악의 경우는 그룹의 사업 조정을 산업은행에 맡기는 것이다. 일시적으로 시장에서 자금줄이 막히면 손을 벌릴 곳은 결국 정부, 산업은행이 될 수밖에 없다.

    구조조정 집도의로서 산업은행의 표정은 파트너일 때와는 사뭇 달라진다. 자금 지원을 계기로 각종 담보를 잡는 것은 물론 선제적 자구안, 오너 일가의 고통 분담까지 가능한 모든 안전장치를 마련한다. 산업은행 손을 거친 수많은 기업들은 고압적인 일처리에 학을 뗐다. SK그룹은 대관 능력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지만 산업은행의 완고함 앞에선 힘을 발휘하기 어려울 수 있다. 오너 일가가 어수선하니 '사재'를 거론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다.

    한 투자업계 관계자는 "SK그룹이 산업은행에 손을 벌리게 되면 상황은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며 "산업은행이 관여하면 엄청난 압박이 시작될텐데 한동안 좋은 시절만 보낸 SK그룹이 잘 대응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라고 말했다.

    산업은행의 손을 빌렸을 때의 부정적 영향도 부담스럽다. 지금까지 수위권 그룹이 산업은행에 고개를 숙인 적은 많지 않다. 무리하게 몸집을 키웠던 금호아시아나그룹을 제외하면 대부분 동부, STX, 두산 등 재계순위 10위권 밖 그룹이 대부분이다. SK그룹이 산업은행에 SOS를 친다는 것은 그룹의 격이 그만큼 떨어졌다거나, 혹은 그만큼 위험한 상황이라는 점을 시장에 알리는 시그널이 될 수 있다.

    최근 삼성전자가 산업은행에 반도체 투자 관련 대출을 요청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산업은행은 이 역시 부인했는데, SK그룹을 둘러싼 소문과는 결이 사뭇 다르다. 삼성전자는 해외에 있는 자금을 운용하기 번거로우니 다른 수단을 찾아 왔고, 정부 차원의 고민에 '관심을 보인' 정도다. 삼성전자에 있어 산업은행은 여러 선택지 중 하나일 뿐이지만, SK그룹 입장에선 마지막까지 뽑고 싶지 않을 카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