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0대 1이 100대 1로'...소수 자문사에 휘둘리는 IPO 수요예측
입력 24.07.02 07:00
그리드위즈, 이례적인 124대 1 낮은 경쟁률
자문사 한 마디에 수요예측 철회한 기관들
밸류에이션 의미 없으니 자문사 결정 따라가
자문사 영향력 우려…"수요예측 취지 어긋나"
  • 국내 기업공개(IPO) 시장의 열기가 지속되는 가운데, 공모주 투자를 겸하는 일부 자문사들의 입김이 커지고 있다는 진단이다. 공모주 가격 측정 능력이 없는 중소형사들이 이들 자문사의 결정을 무작정 따르며, 시장의 변동성을 키우고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실제로 최근 진행된 기관투자자 대상 공모주 수요예측에서는 자문사의 자문에 따라 마감 직전 경쟁률이 급락하는 사례가 발생하기도 했다.

    지난 14일 코스닥 시장에 상장한 전력수요관리 기업 그리드위즈는 기관 수요예측에서 124.6대 1의 경쟁률을 기록하며, 공모가를 밴드 상단인 4만원에서 확정했다. 올해 IPO 시장에서 공모가가 밴드 상단을 넘어서지 못한 것은 그리드위즈가 처음이었다. 지난 4월 유가증권시장에 상장한 HD현대마린솔루션이 밴드 상단에서 공모가를 결정했지만, 이는 기관투자자 수요예측과 무관하게 시장 평판을 고려한 결정이었다.

    124.6대 1이라는 경쟁률도, 최근 IPO 시장의 열기를 고려하면 이례적으로 낮은 수치다. 실제로 그리드위즈 수요예측일을 전후해 진행됐던 노브랜드(1075.61대 1), 라메디텍(1115.44대 1), 씨어스테크놀로지(1084.39대 1) 등은 모두 1000대 1이 넘는 경쟁률을 기록했다. 

    그리드위즈가 이처럼 흥행에 실패한 데는 일부 자문사들의 입김이 작용했다는 설명이다. 실제로 지난달 23일부터 29일까지 진행된 기관투자자 수요예측에서, 그리드위즈는 다른 공모주들과 같이 1000대 1이 넘는 경쟁률을 기록하다 수요예측 마감 시점 직전에 경쟁률이 폭락한 것으로 알려졌다. 자문사들의 자문에 따라 운용사들이 수요예측을 철회한 탓이다.

    한 자산운용사 관계자는 "그리드위즈는 수요예측 마감 30분 전인 29일 오후 4시 30분까지만 해도 1000대 1이 넘는 경쟁률을 보였으나, 막판에 자문과 운용을 겸임하는 자문사들이 '우리는 그리드위즈 수요예측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언급이 있자 경쟁률이 폭락했다"라며 "중소형 운용사들은 자문사의 말만 듣고 따라가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현재 자산운용사인 동시에 투자일임과 자문 라이선스를 가지고 있어 투자와 자문을 함께 할 수 있는 곳으로는 브이엠자산운용, 파인밸류자산운용, 혁신IB자산운용 등이 있다. 이들은 공모주 전문 하우스로, 공모주를 주력으로 하는 자산운용사들 사이에서는 영향력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 신생이나 규모가 작은 자산운용사들이 자문사와 자문 계약을 맺고, 공모주 수요예측에 참여하기 전 자문을 받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는 분석이다. 운용사 자체적으로 밸류에이션을 할 역량이 부족하거나, 현재의 장이 밸류에이션보다는 수요예측에 참여하는 기관의 '이름값'에 의존하는 경향이 높다는 판단에서다.

    한 운용업계 관계자는 "운용사 자체적으로 적정한 기업가치를 따져보고 수요예측에 참여하는 것이 원론적으로는 맞는 방향이지만, 올해 공모주 시장은 기업가치와 무관하게 흘러가고 있다"며 "이에 과거 작은 VC들이 투자를 집행하기 전 유명 VC 투자 여부를 확인했던 것처럼 공모주 수요예측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물론 자문사들이 잘못됐다고만 말할 수는 없다. 자문사 역시 자체적인 분석을 통해 수요예측 참여 여부를 판단하고, 이를 자문사에 알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리드위즈는 밸류에이션 과정에서 PSR(주가매출비율)을 사용했는데, 영업이익이 16억원에 불과함에도 매출 기반 평가법을 적용해 가치가 지나치다는 지적이 나온 바 있다.

    다만 공모주 시장에서 자문사들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이 바람직한 방향은 아니란 목소리가 많다. 일부 자문사에 공모주 시장이 휘둘리는 것은 수요예측의 취지에 어긋난다는 지적이다. 1차로 주관사가 산정한 밸류에이션이 적정한지 2차로 다수의 기관투자자들을 대상으로 수요예측을 통해 검증하는 것이 제도의 취지다.

    한 증권업계 관계자는 "사실 자문사 말만 듣고 수요예측에 참여하는 것은 운용사가 역량이 부족하다는 것을 시인하는 꼴이기 때문에 부끄러워해야 한다"며 "일부 자문사의 영향력이 지나치게 커지는 것은 수요예측 취지에도 어긋나는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