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AI로 뱃머리 튼 SK…방향성엔 공감, 늘어날 사공은 부담
입력 24.07.11 07:00
위기감 한창일 때 반도체·AI에 80조 투자 화두 제시
리밸런싱은 이제 시작…어떻게 마련해 어디에 투자?
방향성 맞아도 어수선한 때 얼마나 구체성 담았을지
SK하이닉스 외 계열엔 결국 신사업과 마찬가지 평
선택과 집중 결과로 사공만 늘어날까 우려 목소리도
  • SK그룹이 반도체·인공지능(AI)으로 뱃머리를 튼 것을 두고 일단은 공감하는 분위기가 많다. 가장 두각을 드러내는 분야고, 성장 잠재력도 압도적인 덕이다. 위기감이 한창일 때 발 빠르게 대안을 제시한 점도 좋은 평가를 끌어낸다. 

    그러나 리밸런싱(사업 조정) 작업은 이제 첫발을 뗀 단계다. SK하이닉스의 괄목할 성과를 빼면 어떻게 조달해 누가 어디에 얼마나 투자할지를 두고 우려도 만만치 않다. 잘나가는 AI 반도체 사업에 사공만 늘어날 가능성도 벌써 거론된다. 

    지난달 SK그룹은 경영전략회의를 통해 2026년까지 80조원을 마련해 AI와 반도체에 투자하겠다는 계획을 마련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도 "그룹 보유 역량을 AI 서비스부터 인프라까지 밸류체인 전반 리더십 강화에 쏟아야 한다"라고 메시지를 내놨다. 첨단소재·그린·바이오·디지털 등 기존 4대 핵심 사업 영역을 AI와 반도체로 좁혀 그룹 역량을 총집결하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현시점 SK그룹에서 AI, 반도체 사업이 가장 두각을 드러내는 게 사실이다. 작년 이후 고대역폭메모리(HBM)를 위시한 SK하이닉스의 괄목할 성과에 대해서도 이견이 없다시피 하다. 현재 국내 대기업 중에선 SK하이닉스 정도가 글로벌 AI·반도체 시장에서 핵심 밸류체인으로 주목받는다. 자연히 SK그룹이 위기 상황에서 미래 대안을 성공적으로 제시했다는 평가가 많다. 

    방향성에 대해서도 공감대가 형성된다. 내년부턴 AI 시장이 한층 더 폭발적인 성장세를 보이기 시작할 것으로 전망된다. 부진했던 신사업 성과를 만회할 수 있을 만한 대안으로 맞춤하단 평이 뒤따른다. 상반기 이례적으로 뒤숭숭한 시기를 보냈던 만큼 한발 먼저 과감한 청사진을 제시하며 반전의 발판을 마련한 모양새다. 

    동시에 우려도 적지 않다. AI와 반도체로 화두를 돌리긴 했으나 그룹은 이제 막 리밸런싱에 돌입한 참이다. 

    그룹이 합쳐 80조원을 투자할 수 있느냐 하는 점부터 눈길을 끌고 있다. 리밸런싱 성과가 드러나기 전까진 설득력을 갖추기 어려운 탓이다. 그룹 비전과 의지를 담은 상징적 수치로 보더라도 시기상 부적절하단 반응도 전해진다. SK그룹은 하반기 이후 주주, 재무적 투자자(FI)는 물론 대주단까지 다수 이해관계자로부터 리밸런싱에 대한 동의를 이끌어내야 하는 상황이다. 

    전략회의를 전후해 사업 조정부터 인사까지 숨가쁘게 치러왔던 만큼 이번에 마련한 청사진이 얼마나 구체성을 띨지 우려도 있다. 그룹의 80조원 투자 계획을 짜기엔 너무 정신없는 상반기를 보낸 것 아니냐는 얘기다. 당장 지난 3월 SK스퀘어도 2조원을 마련해 반도체 중심 포트폴리오를 확충하고 주주환원을 강화하겠다고 밝혔었지만 지난달 수장이 자리를 비우게 됐다. 이번에 발표한 청사진은 스케일이 훨씬 크다. 

    자문시장 한 관계자는 "전략회의 이틀 중 하루를 AI와 반도체에 할애했다고 하니 그룹의 의지가 큰 것은 확실해 보이지만 어수선한 시기에 마련한 청사진이라는 게 걱정"이라며 "겉보기엔 선택과 집중이지만 그룹 계열이 단일 사업을 나눠 담당하는 것도 쉽지 않다. SK하이닉스 외 계열엔 결국 신사업에 가깝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최 회장 발언대로 "지금 미국에서는 AI 말고는 할 얘기가 없"는 시기이긴 하나 뒤집어 보면 투자 기회를 마련하는 것도 쉽지 않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진입 장벽이 낮은 AI 관련 신사업들은 선두 빅테크들이 새 서비스를 발표할 때마다 수십 곳씩 문을 닫아야 하는 상황으로 전해진다. 그렇다고 빅테크들과 자본력으로 정면 승부하기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단 분석이 많다. 

    투자업계 한 관계자는 "사모펀드(PEF) 운용사나 컨설팅펌 사이에서도 AI, 반도체 시장에서 국내 SI나 FI가 참여할 만한 밸류체인을 발라내는 작업이 한창이긴 하다"라며 "문제는 SW 서비스엔 끼어들 틈이 안 보인다는 점이고, 결국 가능한 건 인프라 사업 정도로 추려지고 있다. 압도적 자본과 기술력, 인재풀을 갖춘 해외 사업자가 너무 많다"라고 설명했다. 

    SK하이닉스 HBM은 물론 엔비디아 가속기가 시장을 석권하기까지 우여곡절을 따져보면 단기간 내 대규모 투자 계획을 펼치기엔 불확실성이 너무 높다는 지적도 많다. 현재 반도체 업계 내에서도 엔비디아 칩 중심의 AI 서버 구축 수요가 언제까지 이어질지 의견이 분분하다. 아직은 수익화에 성공한 AI 서비스 모델도 없다. 산업이 몸집을 불리는 과정에서 어떤 기술이 핵심으로 부상할지 몰라 엔비디아 내부적으로도 위기감이 적지 않은 상황으로 전해진다. 

    선택과 집중의 결과로 사공만 늘어나는 것 아니냐는 목소리도 있다. 

    현재 그룹 내 AI, 반도체 밸류체인에 참여할 수 있는 잠재 계열만 5~6곳 이상이 거론된다. 어떤 형태로든 SK하이닉스의 성과와 연동하기 위한 압력이 높을 수밖에 없을 거란 지적이 나온다. 해당 청사진을 실현하기 위한 사업·재무구조는 물론 리더십 기반 역시 아직 갖추지 못한 상황이기도 하다. 

    컨설팅펌 한 관계자는 "단일 지배구조, 리더십 아래 기기 시장을 석권하고 애플실리콘 시대를 연 애플조차도 자체 AI 서비스 구현에서 애를 먹고 오픈 AI와 손을 잡았다"라며 "그만큼 박이 터지는 시장이다. 현시점 SK그룹이 올인하기엔 문턱이 너무 높은 시장일 수 있다. 그룹 반도체 사업에 사공만 늘어나는 것 아니냐는 얘기가 나오는 배경"이라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