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전 '동양 사태' 떠올리게 하는 구영배의 큐텐그룹
입력 24.08.12 07:00
취재노트
유동성 리스크 은폐가 부른 이커머스 불신론
'돌려막기식 경영', 경영진 법적 책임 물을듯
과거 동양그룹 사태와 유사하단 지적 나와
  • "큐텐은 어려운 국내 기업을 인수하면서도 현금을 유입해주지 않는다. 적자 기업에 모회사 지분을 나눠주는 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이런 M&A 방식은 무조건 사고가 나게 돼 있다." (올해 4월, 대형 회계법인 고위 관계자)

    올해 초부터 회계법인 사이에서는 '이커머스 불신론'이 팽배했다. SK그룹이 11번가에 대한 콜옵션을 포기한 이후, 이커머스 시장의 성장이 정체됐다는 인식은 널리 퍼졌다. 발언의 당사자가 국내 이커머스 업체의 회계를 담당하고 있었던 점을 고려하면, 투자업계는 이미 기업 회생신청이 줄잇는 최악의 상황까지 대비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번 사태의 핵심은 이커머스 회사가 판매자들의 대금을 정산해줄 수 없을 정도의 '유동성 리스크'를 겪었음에도, 이를 숨기고 고객 대금을 경영상 레버리지(지렛대)로 활용했다는 데 있다. 

    양사는 판매자들에 대한 대금 정산을 제때 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했음에도, 대대적인 할인 프로모션을 진행해왔다. 새로운 고객의 자금으로 기존의 부실을 메우려는 시도다. 그렇게 모인 자금마저 일부 M&A에 활용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구영배 큐텐그룹 대표는 최근 국회 출석과 언론 인터뷰를 통해 티메프가 여전히 기업으로서의 가치가 남아 있다는 듯한 발언을 이어가고 있다. 알리·쿠팡과 국내외 사모펀드들을 대상으로 M&A와 투자유치를 타진하고 있다는 소식도 들린다. 물론 시장의 시선은 회의적이다.

    구 대표의 행보는 향후 있을 법정 공방을 대비한 포석으로 해석된다. 부도를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고의적으로 '대금 돌려막기'를 했다는 추궁을 피하기 위한 밑작업이라는 지적이다. 

    수년 전부터 티메프의 사업 구조가 돌려막기에 가깝다는 점을 지적해 온 전문가들은 구 대표가 이번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으로 보고 있다. 앞서 구 대표가 지난달 국회에 출석해 위시 인수 과정에서 투입된 자금(400억원)에 티메프 판매 대금이 포함됐다고 시인했던 까닭이다.

    이 같은 양상은 2013년 동양그룹 사태 당시, 모회사의 부실을 메우기 위해 동양증권이 상환 가능성이 불투명한 회사채와 기업어음(CP)을 무분별하게 발행했던 것과 유사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과거 동양그룹이 부도 위험을 숨기고 금융상품을 발행한 탓에 투자자 4만여명이 1조7000억원의 피해를 입었다.

    한 법조계 관계자는 "구 대표가 M&A에 고객의 돈을 사용했고, 이를 인지했다는 점에서 책임 추궁을 피할 수 없게 됐다"며 "과거 동양 사태보다 소상공인에 미친 피해가 더 크다는 시각이 있어, 구제에 최선을 다해도 쉽지 않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당초 티메프의 사업 구조가 본질적으로 지속 가능하지 않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적자는 물론이고, 다음 투자자를 유치하지 않으면 영업을 할 수 없었던 구조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까닭이다. 마지막 투자금 회수처를 물류 계열사 기업공개(IPO)에서 찾았던 것도 시장의 비판을 받고 있다. 공모시장에 '폭탄'을 떠넘기려 했다는 것이다. 

    이번 사태는 국내 이커머스 업계 전반에 대한 신뢰도 하락으로 이어지고 있다. 한때 무한한 성장 가능성을 지닌 것으로 평가받던 이커머스 기업들은 이제는 '모래성'이 됐다. 플랫폼 기업들의 재무 건전성과 지속가능성에 대한 의문이 연이어 제기되면서, 관련 업계 전반에 대한 재평가도 이뤄지고 있다.

    금융당국의 감독 실패도 도마에 올랐다. 이복현 금감원장은 구 대표와 큐텐을 상대로 '양치기 소년'이라며 비판 수위를 높였다. 그러나 티메프의 재무제표 상 허점들은 이미 수년 전부터 발견할 수 있었던 사안들이다. 감사보고서를 받고도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은 상황에서, 감독 기관으로서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는 지적은 피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이커머스 플랫폼에 대한 규제와 감독이 대폭 강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고객 자금 관리와 기업의 재무건전성에 대한 모니터링이 더욱 엄격해질 전망이다. 이미 국회와 정부는 정산 기일을 줄이는 데 뜻을 모으고 관련 법안을 준비 중이다. 

    동양사태 당시, 이명박 정부가 완성했던 '금산분리 완화' 방안은 4년 만에 원상복귀됐다. 9%로 늘어났던 산업자본의 은행 지분 한도도 다시 과거 수준인 4% 이하로 줄었다. 그리고 현재현 전 동양그룹 회장은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사기 혐의로 1심에서 징역 12년을 받았고, 대법원에서 7년형이 확정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