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가 AI 반도체 페이스메이커?…HBM 공급 지연이 빚어낸 역설
입력 24.08.14 07:00
비싼 AI 반도체 걱정 커진 때…엔비디아 로드맵도 잡음
삼성전자 HBM3E 타협적 승인 가능성도 동시에 거론中
AI 시장 판도 감안하면…"어느 때보다 삼성 필요한 때"
의도치 않은 페이스메이커 역할 조명되지만 사실상 오명
  • 삼성전자는 1년 넘게 고대역폭메모리(HBM) 개발에 어려움을 겪어 왔다. 엔비디아가 재차 샘플 검수에 들어간 만큼 조만간 결론이 날 것이란 기대가 높지만 이 기간 인공지능(AI)에 대한 시장 태도도 크게 바뀌고 있다. 반도체가 비싸도 너무 비싸다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엔비디아의 신제품 출시 일정에선 잡음이 새나온다. 원치 않는 오명이겠지만, 역설적이게도 삼성전자가 AI 반도체 생태계에서 페이스메이커 역할을 맡게 된 듯하다는 관전평이 나온다. 

    8월 들어 엔비디아는 차세대 AI 반도체 제품군인 '블랙웰' 시리즈의 양산을 앞두고 샘플링 단계에 돌입했다. 삼성전자가 지난 분기 엔비디아에 제출한 HBM3E 8단 제품 역시 품질 검수가 진행 중이다. 삼성전자는 2분기 중 HBM3E 8단 제품의 양산 준비를 끝마친 터라 이번 분기 중 승인이 나면 본격적인 공급에 나설 예정이다. 

    반도체업계에선 여전히 삼성전자가 HBM의 발열 문제 등을 쉽게 잡지 못하는 것으로 파악 중이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엔비디아의 승인이 떨어지지 않겠냐는 관측이 여느 때보다 높다. 1년을 넘긴 삼성전자의 개발 지연 문제가 더 길어질 경우 엔비디아 역시 발등에 불이 떨어질 상황인 탓이다. 

    컨설팅펌 한 관계자는 "장당 수천만원인 엔비디아 칩 가격을 감안하면 산업 전체 투자(CAPEX) 사이클이 3년 이상 지속되기 어렵다는 관측이 원래도 많았다. 엔비디아도 고객사 지갑 사정을 고려해 로드맵을 짜야 하고, 이 때문에 삼성전자에 계속 기회를 주는 것"이라며 "삼성전자 역시 내부적으로 AI 서버 구축 수요가 얼마나 오래 이어질지 따져본 것으로 전해진다"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마이크로소프트, 메타, 구글 등 빅 테크가 AI 서버를 구축하는 데 들이는 비용 구조를 살펴보면 엔비디아의 고민이 잘 드러난다. 이들이 AI를 학습시키기 위한 서버 1기를 구축할 때 들어가는 비용은 일반적인 서버의 약 40배에 달한다. 이 중 80% 이상은 엔비디아의 AI 가속기(GPU) 값이다. 

    이렇게 투자된 돈이 올 한 해에만 250조원을 훌쩍 넘어설 것으로 전망된다. 그러나 언제 수익으로 돌아올지는 아무도 확답을 내리지 못한다. 최근 증시 폭락의 방아쇠는 거시환경 변수가 당겼지만, 밑바닥엔 이 같은 AI 시장에 대한 걱정이 깔려 있었다는 분석이 많다. AI에 수백조원을 쏟아부은 빅테크들이 최종적으로 소비자들의 지갑을 열지 못하면 다음에 나올 엔비디아 반도체는 누가 사주겠냐는 얘기다. 

    이런 때 엔비디아의 차세대 GPU 출시가 지연될 가능성이 불거졌으니 공교롭다는 반응이 나온다. 반도체 업계에선 제품 가격을 낮춰야 하는 엔비디아가 삼성전자를 HBM3E 공급사로 끌어들이기 위해 얼마간 타협할 가능성을 따져보고 있던 참이기도 하다.  

    반도체업계 한 관계자는 "숙제를 마쳐야 하는 학생보다 숙제를 내준 선생님이 더 불안해진 것처럼 비유된다. 엔비디아가 진도를 너무 빨리 빼서 트러블이 늘어나는 게 아닌가 하는 식"이라며 "호퍼(H100) 시리즈를 내놓은지 2년 만에 블랙웰(B100)을 출시하려 하니 경험을 갖춘 SK하이닉스 외엔 고전하고 있고, 이러면 판매 전략을 유연하게 가져가기도 어려워진다"라고 설명했다.  

    현재 삼성전자가 사활을 걸고 있는 HBM3E 8단과 12단 제품은 엔비디아의 내년 핵심 제품 전반에 탑재될 예정이다. HBM 주문은 공급사 생산능력(Capa)을 기반으로 계약이 이뤄지기 때문에 일정이 틀어졌다고 경쟁사 물량으로 '땜질'하기도 어렵다. SK하이닉스는 지난 1월 이미 내년까지 캐파가 가득 찼다고 발표한 바 있다. 삼성전자가 공급 대열에 합류하지 못하면 시장 전체 AI 반도체 공급량이 제한돼 재차 가격을 밀어올릴 수도 있는 셈이다. 

    일련의 상황을 두고 삼성전자가 AI 반도체 시장의 페이스메이커 역할을 맡게 되는 듯하다는 평까지 나온다. 의도하진 않았지만 선두주자인 엔비디아의 개발 로드맵은 물론 전체 AI 산업의 과열 우려가 불거진 때 균형을 잡아주는 모양새가 됐기 때문이다. 

    수십년 누적된 시장 지위를 감안하면 오명에 가깝지만 삼성전자로선 벌어진 격차를 좁힐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다. 이번 HBM3E 8단을 시작으로 엔비디아와 협력이 본격화하면 시장 안정화에 기여하는 동시에 단숨에 수익성을 끌어올릴 수 있다. 수율도 낮고 공정 난이도도 높은 HBM 특성상 삼성전자가 일단 대열에 합류하기만 하면 경쟁사와 격차가 눈에 띄게 줄어들 거란 시각도 적지 않다. 

    반대의 경우 삼성전자는 물론 업계 전반이 큰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관련 업계에선 내년 HBM3E 수요가 전체 물량의 80% 이상을 차지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투자업계 한 관계자는 "과거 TSMC와의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경쟁에서 만년 2위인 삼성전자의 별칭이 페이스메이커였는데, 지금 HBM에서도 유사한 상황이 됐다"라며 "이번에는 엔비디아 문턱을 넘어설 것이란 기대가 유달리 높기 때문에 삼성전자가 기회를 잘 잡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