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폰금리 0%' 조건에도…기관들의 교환사채(EB) 투자 늘어난 이유는
입력 24.09.04 07:00
자사주 관련 공시 의무 강화에 EB로 눈돌리는 기업들
투자처 마땅치 않은 기관들, 0% 쿠폰금리에도 검토
오버행 이슈 여전…메자닌 채권 발행 수요에 證도 분주
  • 기관투자자(이하 기관)들이 교환사채(EB) 투자에 대한 관심을 높이고 있다. EB는 표면이자율(쿠폰금리)이 다른 메자닌 채권보다도 낮은 등 투자자로선 조건이 유리하진 않다. 그러나 공모주 시장 분위기가 다소 가라앉는 등 투자처가 마땅치 않고 하방 위험을 최소화할 수 있어 EB 투자 검토에 나서고 있다는 설명이다.

    28일 투자은행(IB)업계에 따르면 농심은 1600억원 규모 EB 발행을 추진하고 있다. 자사주를 기초자산으로 하며, 쿠폰금리와 만기이자율(YTM)은 모두 0%다. 발행 목표 시기는 내달 초다. 

    이처럼 기업들이 EB를 활용해 자금 조달을 하는 사례가 늘어나는 중이다. 지난 7월 호텔신라는 자사주 213만5000주를 기초자산으로 1328억원 규모의 EB를 발행했다. 같은달 씨에스윈드도 446억원 규모의 EB를 발행한다고 공시했다. 8월 초 카카오게임즈는 보유한 크래프톤 주식 전량을 기초자산으로 2700억원 규모의 EB 발행에 나선 바 있다. 

    EB 발행에 나선 기업들은 모두 쿠폰금리와 만기이자율을 0%로 제시했다. EB는 또다른 주식연계채권(메자닌채권)인 교환사채(CB)나 신주인수권부사채(BW)보다 조달 금리가 낮게 책정되는 편이다. 신주를 발행하지 않기 때문에 유통물량 증가에 따른 주가하락 위험이 없어 투자자에게 유리하다. 그러나 주가가 상승해 투자자들이 교환권을 행사할 경우 지분율 희석 우려가 있다.

    다소 열악한 발행 조건에도 불구하고 자산운용사, 여전사 등 기관 투자자들은 EB 투자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발행 조건이 불리하긴 하지만 대안이 없다고 입을 모은다.

    한 운용사 관계자는 "투자자 입장에서 EB는 '없어서 투자 못하는' 투자처다. 자사주 관련 법규가 바뀌면서 여러 기업들이 주가에 할증을 적용해 EB를 발행함으로써 저금리로 자금을 조달하려는 목적으로 발행에 적극 나서는 분위기가 생기고 있다"라며 "그러나 조건이 썩 좋진 않은 점은 아쉽다"라고 말했다.

    또다른 캐피탈사 관계자는 "메자닌 채권 구조상 하방이 막혀있는 대신 추가 수익 기회는 열려있으니 기관들 입장에서는 안전한 투자처로 인식하고 있다"라며 "최근 공모주 시장 또한 예전같지 않아지면서 EB가 그 대안으로 떠올랐다. 희망 공모가 밴드 하단 가격으로 공모가를 결정하는 사례가 잇따르면서 내부적으로 공모주 청약 참여는 지양하자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라고 말했다.

    EB 활용법은 지난해 SK하이닉스가 2조원대 해외 EB 발행을 택하면서 주목 받은 바 있다. 반도체 혹한기를 지나며 분기 연속 적자를 기록하던 SK하이닉스에 선제적으로 유동성을 확보할 필요성이 제기된 것이 발행 배경이었다. 주가 상승 시 투자자들이 교환권을 행사, '오버행 이슈'가 생길 수 있다는 우려가 나왔다. 실제로 SK하이닉스의 주가는 EB 교환가액(11만1180원)을 크게 웃도는 17만8800원이다. 

    해당 딜에 정통한 한 투자업계 관계자는 "SK하이닉스의 EB 교환가액보다 주가가 크게 오른 상태라서 교환권 행사 가능성이 있다"라며 "그럼에도 EB 만기인 2030년까지 지속 보유하고 주가 추가 상승을 기다리는 것이 다소 합리적인 판단으로 보이긴 한다"라고 말했다.

    또다른 운용사 관계자는 "주가가 상승할 경우 오버행 이슈가 생길 수 있는 점은 항상 염두에 두긴 해야 한다"라며 "EB 뿐만 아니라, 최근엔 대기업들을 중심으로 CB를 낮은 금리에 발행하려는 경우가 늘고 있다. 불리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물량이 소화될 경우 중소·중견 기업들이 이를 잘못 해석해 덩달아 불리한 조건을 내놓을 가능성 또한 우려된다"라고 말했다.  

    EB를 발행하려는 기업의 수요가 늘면서 증권사들도 주선사를 맡기 위한 노력을 이어가는 분위기다. 메자닌 채권발행 주선은 주로 리테일 부문에서 파생되는 경우가 잦은 것으로 알려져있다. 농심과 호텔신라 EB 발행은 모두 삼성증권이 주선사로 나서고 있는데, 이 경우 또한 그러하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최근 EB 발행 건들은 채무상환이 발행 목적인 경우가 대부분이다"라며 "그렇다보니 발행사들이 공시 전 EB 발행 소식이 시장에 퍼지는 것을 원치 않아한다. 투자자들을 대상으로 물밑에서 마케팅을 해야하는 등 주선이 쉽지만은 않지만 영업을 하긴 해야한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