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아연 경영권 분쟁, 재벌 vs. 사모펀드 양상 치달을까
입력 24.09.19 07:00
MBK-영풍그룹 손 잡고 고려아연 경영권 확보 나서
시장은 아직 판단 유보 분위기…매수 경쟁 재현될까
현대차·한화·LG 등 고려아연 파트너 기업 행보 주목
'심기 불편' 재벌 vs. '재벌 저격수' PEF 양상 갈 수도
  • 고려아연 경영권 분쟁은 영풍그룹이 MBK파트너스와 손을 잡으며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됐다. 최윤범 고려아연 회장에 쌓인 영풍그룹의 감정이 극약처방 형태로 나타난 셈인데 성사를 확신하긴 이르다.

    무엇보다 기업 지배구조 문제를 꾸준히 지적해 온 MBK파트너스가 지배주주로 참여하는 데 대해 현대차, 한화, LG 등 기존 파트너들은 '심기가 불편할' 상황이 됐다.

    MBK파트너스는 13일부터 고려아연 공개매수에 나섰다. SM엔터테인먼트 시세 조종 등 고려아연을 두고 회자하던 문제들을 끄집어냈다. ㈜영풍은 법원에 회계장부 열람 가처분 신청을 냈고, 공개매수 기간 중 자사주 매입은 불법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고려아연의 발을 묶고 있다. 작년 한국앤컴퍼니 공개매수에 실패한 MBK파트너스가 칼을 갈고 나왔다는 평가다. 법무법인 베이커맥켄지앤케이엘파트너스의 도움을 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현 시점에서는 영풍그룹과 MBK파트너스 측이 우위에 있다는 시각이 많다. 최윤범 회장이 뒤늦게 사모펀드(PEF) 등에 손을 벌린다 해도 조단위 매수 경쟁으로 맞불을 놓기는 쉽지 않다는 것이다. 대다수 PEF들은 기업과 관계, 평판 위험 등을 고려해 분쟁이 있는 곳에는 발을 담그기 꺼려한다.

    그럼에도 공개매수 성공 여부는 예단하기 이르다. 세금 등을 고려해 주가가 매수 가격보다 살짝 아래 형성되는 경우 공개매수 성사 가능성이 크다. 이번 이번 공개매수는 발표 당일 고려아연 주가가 매수가(66만원)보다 위에서 형성됐다. 시장이 아직 판단을 유보한 것으로 볼 수도 있는 셈이다.

    현재 영풍과 고려아연 측 지분율은 팽팽하다. 메리츠증권에 따르면 지난 4일 기준 영풍과 특수관계인, 우호세력 지분율은 33.13%로 고려아연 측 33.99%로 큰 격차가 없다. 과거 SM엔터테인먼트 인수전에선 의지가 강한 두 세력이 만나 매수가 경쟁을 벌였다. 한국앤컴퍼니 공개매수 때도 매수가가 인상된 사례가 있었다.

    고려아연 측 우호세력의 존재에 주목하는 시각도 있다. 고려아연은 최윤범 회장 체제에서 공격적인 확장 전략을 펴왔는데 그 과정에서 여러 대기업과 손을 잡았다. 이들이 어떤 목소리를 내느냐에 따라 양상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첫 손에 꼽히는 PEF와 고려아연 뒤에 선 재벌간 자존심 싸움 양상이 될 것이란 분석도 나온다.

    작년 고려아연은 현대차그룹과 '배터리 동맹'을 맺었다. 현대차 해외법인(HMG Global)으로부터 5272억원 증자 대금을 받았다. 2022년엔 한화그룹 해외 계열사(한화H2에너지USA)가 고려아연 유상증자에 참여(4700억원)했다. 그해 고려아연은 자사주를 LG화학, 한화와 맞바꾸기도 했다. 현대차그룹(5.05%), 한화그룹(7.75%), LG화학(1.89%) 등 세 대기업 그룹의 고려아연 지분만 15%에 육박한다.

    이들 기업 총수 중 일부는 최윤범 회장과 돈독한 관계를 갖고 있기도 하다. 그보다는 니켈 안정적 확보(현대차), 신재생에너지와 수소사업 시너지(한화), 이차전지 파트너십(LG화학) 등 사업적 목적에 기반해 손을 잡았다.

    MBK파트너스는 현대차, 한화, LG 등 기업들이 최 회장의 우호 지분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우호 지분이라면 최윤범 회장과 의결권을 공동으로 행사하는 등 공동행위 주요 주주로 공시했어야 하지만, 해당 기업들은 비즈니스 파트너십에 대해서만 공시했을 뿐 공동행위자임을 밝힌 바가 없다"고 부연했다.

    아직까지도 한국 재벌들의 영향력과 결속력은 공고하다는 점은 변수다. 기업 지배구조 개선에 목소리를 내고 있는 MBK파트너스가 이번 공개매수를 진행하며 대기업에 사전 양해를 구했을 가능성은 크지 않다. 기업들 역시 꼭 최 회장을 돕는 목적이 아니라도 원활한 협력을 위해서는 고려아연의 지배구조가 흔들리지 않기를 원할 수 있다.

    현실적으로 현대차 계열사가 고려아연의 대리자로 나서 대항 공개매수에 뛰어들긴 쉽지 않다. 그러나 협업 관계를 청산하는 등 행동에 나서면 영풍그룹과 새 주인 입장에서도 불편한 상황이 될 수 있다.

    어느 시점에 가면 결국 현대차나 한화, LG 등도 어떤 식으로든 '의사결정'을 내려야 할 시기를 맞이한다. 최대 주주가 바뀌면 경영진 교체가 수반될 것이고 이 과정에서 주주사들의 의결권 행사 시점이 온다. 이사회를 여는 것부터 주주총회에서 표를 던지는 것까지 안해도 되는 일에 관여해야 하는 불편한 상황에 놓인다. 현대차 기획조정실 인사가 고려아연 기타비상무이사로 참여하고 있다. 

    그렇다고 아무런 의사를 표명하고 있지 않으면 MBK파트너스가 '최대주주'가 되는 상황을 수용해야 한다.

    물론 주주사들끼리 협업 과정을 통해 돈독한 관계를 마련할 수도 있다. 하지만 오너 일가들 사이에 끈끈한 혼맥을 유지하고 있는 국내 대기업들은 본인들이 투자한 회사의 1대 주주가 PEF가 되는 점을 '불편하게' 여기는 경향이 강하다.

    현대차의 피곤함은 더할 상황이다. 승계를 마친 LG, 순항 중인 한화와 달리 현대차는 정의선 회장으로의 승계 작업이 지지부진하다. 그룹 내 지분이 많지 않은 정의선 회장과 현대차 입장에선 한 다리 건너 경영권 분쟁을 간접적인 압박으로 느낄 가능성도 있다. 고려아연과 현대차 지배구조에서 중요한 조언을 해온 김앤장법률사무소가 어떤 역할을 할지도 관심사다.

    한 투자업계 관계자는 "고려아연 측에 서 있는 현대차 등 대기업들이 이번 분쟁에서  과연 뒷짐만 지고 있을까 싶다"며 "MBK파트너스가 잘 준비한 만큼 싱겁게 끝날 가능성도 있지만 재벌들이 뒤에서 결집하면 재벌 대 PEF간 자존심 경쟁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고 말했다.

    고려아연 경영권 분쟁은 정치권 이슈로까지 확산하는 양상이다. 고려아연이 소재하는 울산시의 김두겸 시장은 추석을 하루 앞둔 16일 '사모펀드의 약탈적 인수합병 시도에 깊은 우려를 표하며, 울산시장 으로서 절대 좌시하지 않겠다'는 긴급 입장문을 냈다. 김 시장은 18일엔 기자회견을 열어 문제점을 거듭 지적했다. 박희승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국민연금이 MBK파트너스를 위탁운용사로 선정한 과정을 따져보겠다고 했다. 일부 고려아연 소액주주들은 현 경영진에 대해 지지 의사를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