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K가 재벌들에 던진 돌…사모펀드(PEF)의 역할론을 바꿨다
입력 24.09.26 07:00
MBK, 한국앤컴퍼니 이어 고려아연 분쟁 뛰어들어
기업 도우미 자처했던 PEF, 공개적 개입 이례적
제도 도입 20주년 맞아 제반 환경 모두 바뀌어
기존 재벌체제 흔들 속 투자자 눈높이 더 높아져
"야만인들 문 턱 넘기 시작했다" 시장 강력한 변수
PE 시장 판도 바뀔지 vs 압박에 백기 들지 주목
  • '마이클 병주 킴(Michael Byungju Kim)'의 MBK파트너스는 사모펀드(PEF) 제도가 도입된지 20년만에 국내는 물론 아시아 최대 PE로 성장했다. 운용 자산만 40조원이 넘고, 투자기업의 매출 합계는 60조원이 넘는다. 김병주 회장 개인적으로는 포브스가 선정한 2023년 한국 최고 자산가 순위에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을 제치고 1위에 오르기도 했다.

    과거 MBK의 투자 포트폴리오를 간략하게 살펴보자. 한미캐피탈, KT렌탈, 딜라이브, 코웨이, 두산공작기계, 홈플러스, 오렌지라이프, 롯데카드 등등 상당수가 기업 구조조정과 관련된 딜(Deal)들이다. 재무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기업의 자산을 사들여 잘 운영하다가 다른 곳에 팔거나, 포트폴리오를 조정하려는 기업을 도와주는 역할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이는 MBK뿐만 아니라 국내 PE 대부분이 그러했다. 기업과 시장의 조력자, 그게 제도의 도입 취지이기도 했고 말이다.

    지금은 뭔가 확실히 달라졌다. MBK가 숨겨놨던 '이빨'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전조 현상은 있었다. 지난해 MBK는 형제 간 경영권 다툼이 있었던 한국앤컴퍼니 주식 공개매수를 시도했다. 경영권 확보에는 실패했지만, 시장에선 모두들 "MBK가 갑자기 재벌간 싸움에 왜 뛰어든 걸까?"라는 의문을 가졌다. 그리고 1년만에 MBK는 고려아연-영풍의 경영권 분쟁에 뛰어들었고 이 이슈가 올해 한국 자본시장의 '최고의 장면'인 것은 당연하다.

    그렇다면 왜 '마이클 병주 킴' 회장과 MBK는 하필 지금, 재벌들과의 싸움을 시작하게 된 걸까.

    구조적으로 살펴본다면 시장의 제반 환경 자체가 바뀌고 있다.

    한국뿐만 아니라 글로벌 시장에서도 PEF의 한계성과 역할 재조정에 대한 얘기는 심도있게 다뤄지고 있다. 전반적으로 글로벌 PE들의 자산 보유기간이 늘어나고 있는데 투자 회수(Exit)가 예전처럼 원활하게 이뤄지지 않는다는 얘기다. 기업을 사고 파는 수요 자체는 줄고 있는데 펀드 구성은 쉽지 않다. 그렇다고 리파이낸싱이 유리한 조건으로 잘 되는 것도 아니다. 금리가 떨어진다고는 해도 옛날 생각을 하면 여전히 비싸보이는 게 사실이다.

    이전과는 투자 전략이 달라져야 한다는 건데 그래서인지 글로벌 대형 PE들은 최근 '사모펀드' 색깔 지우기가 한창이다. 운용 규모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지자 투자 수익률이 아니라 자체적인 성장과 지속가능성을 증명해야 하는 부담까지 짊어지게 됐다. 특히 KKR, 블랙스톤, 칼라일처럼 주식 시장에 상장돼 있는 PE들이 그렇다. 돈을 더 모으려면 투자 전략을 공개해서 리테일 시장에서도 자금을 조달해야 한다. 자신들의 정체성을 버리고, 점점 대형 자산운용사가 될 수밖에 없는 모양새로 흘러가고 있다.

    MBK처럼 사이즈가 큰 로컬 PE 입장에선 오히려 기회다. 이미 성숙화한 선진국 시장에 비해 동아시아에는 상대적으로 많은 딜들이 기다리고 있다. 동아시아의 다양한 투자자들로부터 '쩐(錢)'을 받고 있는 MBK 입장에선 글로벌 PE들과 대등하게 또는 더 앞선 상태에서 딜들을 따낼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됐다. 투자자들은 더 높은 수익률을 요구하게 되고 MBK는 진짜 '기업 사냥꾼' 역할을 도맡을 수 있다.

    한국으로 좀 더 좁힌다면 재벌 체제가 와해되고 있는 점이 한몫한다. 재벌가 분쟁에 PE가 개입한다는 건 재벌 1~2세대에선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평소 다툼이 많더라도 '대사(大事)'엔 집안이 똘똘 뭉치는 경향이 있기에 애초에 시작못할 싸움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이제 재벌 3~4세 시대가 본격화하면서 '피(血)'의 농도는 옅어질 수밖에 없고, 몇십년 함께한 동업 관계라면 더 말할 필요도 없다. MBK, 그리고 김병주 회장 입장에선 지금 재벌가의 빈틈이 누구보다 커 보였을테고, 앞으로 그런 틈은 점점 더 많아진다.

    경영권 분쟁에서 PE들의 공개적 개입은 한국에선 흔치 않지만, 본고장 미국에선 50년 전에 사회적 문제가 될 정도로 다반사였다. 70년대 이전까진 포천(Fortune) 500대 기업은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한 회사에 바치면서 CEO에 오른 '컴퍼니맨(company man)'들의 시대였다면 그 이후론 회사 투자자에게만 충성하는 '논컴퍼니맨(noncompany man)'이 주인공이 돼 지금까지 시장을 주도하고 있다.

    투자은행(IB)업계에선 '바이블'로 읽히는 '문 앞의 야만인들(Barbarians at the gate)'에서 다루는 RJR나비스코 인수를 둘러싼 기존 경영진과 콜버그크래비스로버츠(KKR), 그리고 그들 뒤에서 돈을 대주는 투자자들간의 싸움이 한국에선 이제 시작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첫 테이프를 21세기 '논컴퍼니맨' 김병주 회장이 끊었다.

    김병주 회장은 이 '게임'을 즐기고 있을지 모른다. 다른 PE들엔 '일탈'로 비쳐질 수 있는 움직임이 자신감의 발로라는 평도 있다. 이제 시장에서 MBK는 이 정도 목소리는 낼 수 있고, 내도 된다는 자신감이다. 김 회장 개인적으로도 요 몇 년 새 그런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김 회장은 2년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사모펀드 운용사는 이름처럼 프라이빗하게 가는 게 이상적"이라며 상장 계획이 없다고 밝혔다. 또 아시아적 자본주의를 발전시키겠다는 비전도 제시했다. 이말대로라면 동아시아에 글로벌 PE들보다 더 PE스럽게(?) 공격적인 투자에 나설 개연성이 있다.

    김 회장은 투자자들에게 연례 서한을 보내는데 지난 4월 서한에선 "가족 소유 재벌 기업들은 역사적으로 비핵심 자산의 전략적 매각과 유동성 필요 차원에서 다수의 딜 플로우를 생성시켰다"고 평가했다. 최근 경영권 분쟁에 공개적으로 뛰어드는 걸 보면 이젠 소수 지분으로 그룹을 지배하는 가족 소유 재벌 구조가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핵심이고 본인이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과 해결해야 하는 당위성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듯 하다. 

    김병주 회장은 10살 때 미국으로 넘어가 하버포드 컬리지(Haverford College)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한 때 작가를 꿈꿨다. 그리곤 월스트리트에 입성했고 이후 자신의 이름을 딴(한국에선 흔치 않다) 독립 PE를 차렸다. 김 회장의 영문 서한과 영어 프레젠테이션이 회자될 정도로 탁월한 능력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시간이 지나 2020년엔 자전적 소설 '오퍼링스(Offerings)'를 출간하기도 했고 영화화 소식도 전했다. 잠깐이지만 한국 최고의 부자이기도 했다. 몇몇 건을 제외하면 크게 실패한 딜도 없다. 최근 MBK가 내놓은 보도자료는 PE치고 자극적(?)이라는 평이 있다. 하지만 김병주 회장도 그 사안을 알고 있고 컨펌했다면 그게 앞으로 MBK의 전략 방향성일 수도 있다. 행동주의를 앞세운 강한 공격 본능이다.

    한국 자본시장에 MBK가 던진 돌은 생각보다 더 큰 파문을 만들 수 있다. 그동안 정책적 지원 하에 몸집이 커진 국내 PE들이 제색깔을 띨 계기가 마련됐다. 표면적으로는 여타 PE들이 MBK의 불만을 표하고는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나쁘지만은 않다. 누군가는 특정 업종에 전문가가 될 수 있고, 누군가는 친재벌 전략, 또 누군가는 반재벌 전략를 펼치는 다양한 그림이 만들어질 수 있다. 본의 아니게 고려아연 경영권 분쟁건에서는 이권에 영향을 받을 수 있는 재벌들간의 연합도 조성되는 분위기다. 한국 자본시장에서의 '쩐의 전쟁'과 '합종연횡'은 이제 시작인지도 모른다.

    MBK가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느냐는 별개의 문제다. 아무리 재벌이 해체되는 분위기라지만 여러 혼맥으로 몇 십년 공고하게 얽히고설킨 재벌들이 PEF에 무릎을 꿇을거라고 생각하는 이들은 아직 많지 않다. 김병주 회장이 글로벌 스탠더드 관점에서 접근한다고 하더라도 재벌의 결속력을 너무 얕본거 아니냐는 얘기들이 벌써부터 나온다. 또 눈도장 찍혔으니 앞으로 재벌 딜을 따낼 수 있을지도 미지수다.

    정부 당국과의 싸움도 본격 시작될 수 있다. 김 회장이 연례 서한에서 직접 밝혔듯 자본시장법은 한국 사모펀드 시장을 육성시키는 데 결정적 영향을 미쳤고 이런 정책적 지원이 지금의 PE들이 시장 리더십을 갖출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줬다. 그런데 지금부터 그 대척점에 서는 모양새를 펼치게 될 경우 정치적 저항이 만만치 않을 수 있다. 벌써부터 국가 기간산업을 흔들고 있다며 여야 정치권은 김병주 회장에 대한 국감 소환 목소리를 내고 있다.

    반대로 신경을 안 쓸거라는 평도 있다. MBK가 이제는 빚 질게 별로 없기 때문이다. 한국 기관들로부터 받는 돈도 전체 굴리는 자산에 비하면 일부에 불과하다. 다양한 국적의 자본을 받아 아시아에서 투자를 더 늘리며 그들의 욕구를 충족시켜줄 본분이 더 중요해지고 있다. MBK에 있어 한국은 그런 투자지역 중 하나뿐이다. 

    올해부로 한국 자본시장에서 PEF들의 역할론은 바뀔 수 있다. MBK의 행동주의적 전략이 성공할 수도, 실패할 수도 있고 이는 김 회장의 자신감일 수도, 오만함일 수도 있다. 다만 한국판 '문 앞의 야만인들'이라 할 수 있는 MBK는 그 문턱을 넘기 위해 한 발 더 내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