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감원·금융위에 이번엔 국민연금도 '책임투자' 압박…또 팔 비틀린 운용사들
입력 24.10.02 07:00
Invest Column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 위탁운용사 대상 간담회
책임투자 강조하며, 적극 의결권 행사, 주주활동 당부
이복현 '의결권 미흡 패널티' 이어 금융위원장 압박까지
기업 경영 개입, 운신의 폭 좁은 국민연금
결국 운용사들 압박하는 전략으로 선회(?)한 듯
  •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가 자산을 맡긴 위탁운용사들을 상대로 '책임투자활동'을 강화할 것을 주문했다. 이달 초 금융위원장이 자산운용사 최고경영자(CEO)들을 불러 모아 '의결권의 적극적 행사'를 강조한 지 불과 한달이 지나지 않은 시점에 국민연금까지 나서 운용사들에 압박을 가하는 모양새가 연출되고 있다.

    기금운용본부는 지난 25일 주식 위탁운용사 관계자들과 여의도에서 간담회를 갖고 책임투자를 강조하며 '적극적인 의결권 행사'와 '주주활동'에 관심을 가져줄 것을 당부했다. 국민연금은 현재 전체 국내 주식투자(약 158조7000억원)의 절반가량을 위탁운용사에 일임해 운용하고 있다.

    국민연금이 운용사들을 대상으로 책임투자를 강조하고 있는 것은 최근 금융당국 및 정부의 움직임과 무관하지 않다는 평가다.

    잠정 중단되긴 했지만 두산그룹의 지배구조개편 과정에서 잡음이 일자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은 지난달 개별 운용사들의 "의결권 행사 사례를 살펴보겠다"며 "지속적으로 점검해 미흡 사례를 실명 공개하겠다"며 강수를 뒀다. 뒤이어 김병환 금융위원장이 운용사 CEO들을 만나 "장기적인 기업가치 제고 노력에 소홀한 측면이 있다"고 질타하며 운용사들의 적극적인 의결권을 행사를 주문했다.

    금감원과 금융위는 책임투자를 강조하는 과정에선 특정 기업을 언급하지 않았다. 다만 두산그룹 사태에 이어 최근엔 MBK파트너스의 고려아연 공개매수 발표로 재계 및 금융업계가 촉각을 기울이고 있는 상황이다. 정치권에선 이미 공론화를 시작했고 정부 역시 예의주시하고 있는데 운용사들의 실질적인 자금줄인 국민연금이 적극적 의결권 행사 등의 메시지를 전달하자 운용업계는 다소 혼란스러운 모습이 감지된다.

    국민연금도 고려아연 공개매수와 관련해 운용사들에 의견을 내비치지 않았다. 국민연금의 결정이 경영권 분쟁의 결과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에 신중한 모습을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그러에도 불구, 운용업계에 대한 하필 이 시점에 '책임투자'를 강조하는 모습이 공교롭단 반응도 나왔다.

    이번 간담회에서 국민연금의 적극적인 주주활동에 대한 요청에도 불구, 운용업계에선 적극적 의결권 행사와 주주활동에 대해 현실적인 어려움을 토로하고 있다. 

    국민연금은 기금운용본부 내 수탁자책임실(책임투자팀, 주주권행사팀)에서 관련 업무를 전담하고 있고 또 보건복지부 산하에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 등을 구성해 주요 사안들에 대해 심의 의결하는 역할을 맡기고 있다. 국민연금이 2006년부터 시작한 책임투자에 관한 활동으로 충분한 인력과 데이터를 쌓아 놓았다. 

    반면 일부 초대형 금융기관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운용사들은 수 백 곳에 달하는 기업들의 현황을 면밀히 파악하고 일일이 의결권 및 주주활동 방향을 설정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책임투자활동의 강화는 운용사들이 지향해야 한다는 점에선 이견을 갖는 이들은 많지 않다.하지만 책임투자와 주주활동도 모두 '수익률의 극대화'란 대전제 아래 추진돼야 한다는 부담은 상당하다. 나름대로 투자를 통해 인력과 시스템 등 책임투자 체계를 잘 갖춘다고 한들 더 많은 수수료를 보장받는 것도 아니다.

    초장기적인 관점에서 수익률의 제고는 기본이고, 건전한 투자활동을 통해 자산가치를 높이는 것을 목표로 하는 국민연금과, 매 기점마다 수익률로 심사 받고 위탁사 지위 유지를 걱정해야 하는 운용사들의 사정은 다를 수밖에 없다.

    국민연금이 실제로 적극적인 의결권 행사에 나선다거나 눈에 띄는 주주권 행사 움직임을 나타내고 있느냐는 또 다른 차원의 문제다. 기업들의 정기 주주총회, 또는 논란이 일었던 임시 주총에서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 방향과 합치하는 결론이 난 곳은 그리 많지 않다. 그렇다고 국민연금이 투자 비중을 줄였다거나, 이사진을 파견해 연금의 의사 결정을 기업 측에 대입하기 위한 일련의 노력들이 있었는가도 미지수다.

    적극적 의결권 행사, 주주활동은 운용사들에겐 이미 '죽음의 길'로 불리고 있다. 과거 SM엔터에 공개서한을 보냈던 KB자산운용의 관계자들은 회사를 떠나야했고, NH아문디운용이 LG에너지솔루션 분사를 적극 반대하자 초대형 증권사 NH투자증권은 IPO 주관사 선정을 위한 제안서조차 받지못한 사례는 아직도 회자된다.

    국민연금은 기업 경영에 개입하기도, 그렇다고 마냥 손 놓고 지켜보기만은 어려운 처지임은 분명해 보인다. 고려아연 사태에서 보듯, 기업을 향한 외부의 공세는 더욱 거세질 것이고, 그 때마다 국민연금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해야할 가능성이 높다. 결국 국내 주식 투자 자산의 절반을 운용하는 위탁운용사들이 국민연금의 의중을 '알아서' 판단하고, '자발적(?)'으로 움직여줘야 하는 상황에서 최근의 메시지가 전달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