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 반도체 리더십 복원 마지막 기회…사업지원TF, 간섭 아닌 '지원' 머물러야
입력 24.11.13 07:00
30년 전 램버스와 닮은 HBM…과거 삼성전자는 달랐는데
고객·현장 목소리 외면한 리더십·거버넌스가 위기 본질
반도체 리더십 바로 세울 마지막 기회 꼽히는 연말 인사
TF 하마평도 결국 재무통 순환인사…"지원 역할로 빠져야"
  • 올해는 삼성전자에 가장 굴욕적인 한 해로 기록될 가능성이 크다. 고객사와 투자자는 물론 내부 임직원마저 회사에 등을 돌리고 불신을 쏟아내고 있다. 위기를 극복하자면 정확한 진단과 처방이 필요하다. 안팎의 전·현직자들은 "고객과 시장이 필요로 하는 기술을 제공하는 역량부터 다시 갖춰야만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다"고 입을 모은다. 

    삼성전자는 작년 인사를 허투루 날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곧 있을 올해 인사는 마지막 기회로 꼽힌다. 근간인 반도체(DS) 부문부터 리더십을 바로 세우고, 잡음이 끊이지 않는 사업지원 태스크포스(TF)와의 경계를 명확히 그어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30년 전 램버스와는 달랐던 삼성전자의 HBM 대응

    30여년 전 삼성전자는 인텔과 램버스 D램(RDRAM) 공급을 협력한 적이 있다. 현재의 고대역폭메모리(HBM) 시장 구조와 매우 유사했다. PC 시대가 열리며 중앙처리장치(CPU) 쓰임새가 날로 커져가는데, D램이 CPU 개발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병목을 일으키고 있어 대안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엔비디아 가속기(GPU)가 인공지능 시대의 핵심 두뇌로 떠오르는 때 D램이 발목을 잡는다는 이유로 HBM이 부상한 것과 판박이다. 

    1990년대 초는 삼성전자가 전 세계 D램 시장 점유율에서 갓 1위를 거머쥐었던 때다. 현재의 3사 과점 구도와 달리 미국, 일본, 유럽 각지 12개 D램 공급사가 10% 안팎 점유율로 다투고 있어 1위라고 해도 형편이 넉넉하지도 못했다. 그러나 삼성전자는 인텔 요구대로 RDRAM 공급 협력에 나서는 동시에 이후 대세로 굳어질 DDR D램 개발까지 병행했다. 

    결과적으로 RDRAM이 시장성 문제로 DDR에 밀려 사장됐지만 삼성전자는 1등 지위를 이어갈 수 있었다. 고객과 시장의 목소리를 흘려듣지 않고 어떤 기술이 뜨고 지건 대응할 수 있는 여력을 갖춰놓은 덕이다. 당시 양사의 RDRAM 공급 논의를 담당했던 실무자가 경계현 전 삼성전자 반도체(DS) 부분장과 팻 겔싱어 현 인텔 최고경영자(CEO)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30여년 뒤 HBM 시장에서 엔비디아 요구를 끝까지 따라준 건 SK하이닉스였다. 시장이 열리기 직전까지 우위를 점하던 삼성전자는 그러지 못했다. SK하이닉스가 투자자들에게 "HBM 시장 성장률이 D램과 비교 불가할 정도로 높다"라고 설득하고 있을 때 삼성전자에선 경영진이 직접 사업 중단을 지시했다. 그에 따른 대가가 노골적으로 드러난 장면이 지난 3분기 양사 실적발표다. 이번에는 HBM이 D램 시장을 뒤집어버린 것이다. 삼성전자 주가는 반성문에도 아랑곳 않고 5만원 선의 바닥을 향하기 시작했다. 

    삼성전자의 패착은 시장 예측 실패 아닌 고객과의 소통

    SK하이닉스와 달리 AI 시장 방향을 읽지 못해 코너에 몰리게 됐다는 분석이 많은데, 업계에선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고 지적한다. 어떤 반도체가 패권을 쥐게 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업계 한 관계자는 "아무리 뛰어난 기술도 고객에게 쓸모가 없으면 사장된다. 반도체는 결국 고객이 필요로 하는 걸 맞춰잡는 쪽으로 기술 개발이 이뤄질 수밖에 없다"며 "PC, 모바일, 서버를 거쳐 AI 시대로 접어들면서 요구되는 반도체 스펙은 나날이 높아지고 복잡해지는데, 일개 회사가 이를 모두 충족시킬 솔루션을 앞질러가서 내놓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라고 설명했다. 

    결국 가장 정확하게 예측하는 회사가 아니라 가장 부지런히 고객사와 소통하고 적기에 솔루션을 제공하려 노력하는 회사만이 경쟁을 이어갈 수 있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이를 증명하는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 대만 TSMC가 꼽힌다. TSMC는 세계 최초로 3나노미터(nm) 공정 양산에 돌입했다는 홍보문구 없이도 전 세계 팹리스들의 전폭적 지지를 받고 있다. 회로선폭을 좁히는 경쟁은 부차적이고, 제때 고객 요구대로 칩을 찍어준 덕에 절대적인 입지에 올라섰다. 

    시장에선 HBM을 기점으로 삼성전자가 예전 같지 않고 뭔가 잘못 굴러가고 있다는 목소리가 늘었다. 그러나 현업에선 수년 전 파운드리 투자를 본격화하던 시점부터 배가 산으로 가고 있었다는 증언을 내놓고 있다. 고객과 마주하는 현장 실무자들의 목소리가 묵살되고 실종되기 시작한 것이 그 즈음부터고, HBM은 이로 인한 수많은 실패 중 하나에 불과하단 얘기다.  

    반도체 사업에 부합하는 리더십·거버넌스부터 복구해야 

    투자업계 내 삼성전자 출신 한 관계자는 "반도체 업의 특성상 고객과 수시로 소통하는 삼성전자 실무진들이 HBM의 중요성을 몰랐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시장의 기회와 해결 방안 모두 현장에 있는데, 그런 목소리들이 의사결정 과정에 반영이 안 된 것"이라며 "HBM을 놓친 것은 물론 고객도 없는데 무리하게 파운드리를 투자했다가 감당 불가한 상황이 닥친 것도 다 그런 맥락"이라고 전했다. 

    위기를 촉발한 최초의 도미노는 기술 경쟁력 저하가 아니라 왜곡된 의사결정 구조에 있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올 들어 사업지원 TF향(向) 비효율적인 보고 절차까지 폭로되며 TF가 주범 격으로 조명되고 있지만 DS 부문 내 거버넌스가 무너진 근본 원인부터 바로잡아야 한다는 얘기다. 재무 전문가냐, 엔지니어 출신이느냐를 따지기보단 그동안 삼성전자가 반도체 산업의 본질에 부합하는 리더십을 마련하지 못한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삼성전자 경영진을 역임한 한 인사는 "재무통 한 명의 권한 남용으로 삼성전자 수준의 회사가 무너졌다고 보긴 힘들다. 선배들의 유산을 물려받은 엔지니어 출신 경영자들의 안일함과 리더십 부족도 함께 작용했다고 봐야 한다"라며 "선대 회장 시절에도 비서실과 같은 관리 조직이 반도체 사업에 개입할 수는 없었다. 능력 있는 실무자 출신 사장에게 투자부터 인사까지 어느 정도 전권을 주는 형태로 리더십을 보장하고, TF는 지원 역할로 한발 물러서야 할 것으로 보인다"라고 말했다. 

    전영현 부회장이 DS 부문 새 수장으로 복귀하며 리더십이 강화하고 있다는 관측은 늘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포스트 사업지원 TF에 대한 하마평도 오르내린다. 투자업계에서도 정현호 사업지원 TF장 부회장의 후임으로 박학규 최고재무책임자 사장이나 최윤호 삼성SDI 사장이 내정될 가능성을 따져보고 있다.

    반도체 경쟁력 복원이 시급한 때에 그룹 내 재무통 순환인사가 리더십 바로 세우기에 영향을 미칠까 우려하는 시각이 많기 때문이다. 반도체 부진이 길어지면 향후 한국 자본시장 전반을 짓누를 대형 악재가 될 수 있다. 사업지원 TF의 변화 자체는 부차적인 문제일 뿐, 시장에선 이번 인사가 전 부회장 중심 반도체 리더십에 미칠 영향을 예의주시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