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아연 유증 철회에 재판부 책임은 없을까
입력 24.11.18 07:00
취재노트
고려아연 유증 취소 후폭풍에 시장 전반이 진흙탕
가처분 기각 재판부 책임 거론…"정무적 판단했나"
MBK측 자료 내세워 '소명되지 않는다' 판결했지만
회복 불가 손해 진행중…책임서 자유롭기 어렵다 평
  • 고려아연이 문제의 유상증자를 철회했지만 금융감독원의 칼끝은 피해 가기 어려울 전망이다. 해당 증자를 주관하려던 미래에셋증권 역시 조사를 받고 있다. 정상 궤도를 벗어난 주가는 계속해서 시장 혼란을 부추기고 있다. 

    진흙탕이다. 운 좋게 치고 빠진 덕에 수수료, 이자로 단기에 이문(利文)을 흠뻑 취한 일부 증권사를 빼면 분쟁의 최종 승자를 가려내기도 무색하다. 고려아연이 무리하게 경영권 방어에 나선 뒷수습을 온 시장이 짊어지는 형국이 됐다. 최윤범 회장에 힘을 실어준 임직원들도 이런 결과를 바라진 않았을 것이다. 

    고려아연의 자사주 공개매수 취소 가처분을 기각한 재판부도 지금 상황에 대한 책임에서 자유롭기 어렵다는 말이 나온다. 

    처음부터 시장에선 조 단위 돈을 빌려 자사주를 비싸게 사들이는 고려아연 측 방어 전략이 배임 아니냐는 시각이 많았다. 고려아연은 지난 수년 50만원 안팎에 머물던 자기주식 매수가를 막판 89만원까지 끌어올렸다. 재판부는 MBK파트너스와 영풍이 신청한 두 차례 가처분을 모두 기각했다. 판결 사유를 들여다본 시장 관계자들은 겉으로는 재판부 결정을 존중한다면서도 뒤로는 '정무적 판단'을 내린 것 같다며 여전히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다. 

    투자은행(IB)업계 한 관계자는 "최 회장 개인의 지배력 유지 수단으로 자사주 공개매수에 나서는 구도이다 보니 증권업계나 법조계 모두 배임 소지가 짙다고 본 것이 사실"이라며 "재판부가 양측 공개매수를 저울질하는 투자자들을 너무 의식한 것이 아니겠냐는 등 뒷말이 많았다. 인용하면 마치 재판부가 한쪽 창구를 닫아버리는 것처럼 비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괜히 뒷말이 나오는 게 아니다. 이사회에서 결정한 자사주 취득을 막아달라는 식의 가처분 신청은 통상 만족적 가처분으로 분류된다. 법원이 가처분을 인용하는 즉시 본안 소송에서 이긴 것과 동일한 효과를 누릴 수 있다는 뜻이다. 이 때문에 일반적인 가처분과 달리 채권자(MBK·영풍) 스스로 주장하는 바를 증명하도록 하는 책임이 주어진다. 가처분을 원하는 사람 스스로, 이른바 '고도의 소명'을 해내라는 것이다. 

    가처분을 신청한 측에 증명 책임을 지우는 이유가 있다. 본안 판결 없이 가처분만으로 상대측을 저지할 수 있다면 남용될 우려가 있는 탓이다. 실제로 고려아연은 양측 분쟁이 한창이던 당시, MBK가 이미 기각된 가처분을 동일한 내용으로 재차 신청한 것을 문제 삼기도 했다. 

    법조계에서도 품 많이 드는 본안 소송 대신 가처분을 최종 분쟁해결 수단처럼 활용하는 데 대한 비판이 많은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이번 사안은 본안 소송을 대체하려 가처분을 고집하는 경우와 거리가 멀다는 평이다. 고려아연이 빌린 돈으로 자사주를 사들인 뒤 본안 판결에서 이겨봤자 상황을 되돌릴 방법이 없으니, 재판부가 신속하게 따져볼 필요가 충분한 사안이었다는 얘기다. 

    법조계 한 관계자는 "이런 종류의 가처분에선 재판부의 판결 재량이 늘어나는 동시에 채권자 스스로 소명해야 하는 책임도 커지는 구조라 전부터도 맹점이 있다는 지적이 있어 왔다"라며 "기각 판결도 결국 ▲MBK가 제출한 자료만으로는 소명이 안 된다 ▲나머지 판단은 본안으로 미룬다는 내용에 가까웠다. 이 때문에 업계 내에서도 비판이 많았다"라고 설명했다.

    즉, 재판부는 "MBK가 낸 자료로는 고려아연 측 공개매수가 회사에 해 끼치는 행위인지 아닌지 소명되지 않는다"는 선까지만 판단했다는 얘기다. 

    당시 MBK가 소명하지 못했다는 회복 불가능한 회사의 손해가 지금 버젓이 일어나고 있다. 고려아연은 두 차례 가처분이 기각된 덕에 자기주식을 89만원에 사들이고, 직후 2조5000억원 규모 유상증자 계획을 기습 공시했다. 정황상 자기주식을 비싸게 사들이기 위해 빌린 돈을 주주들에게서 걷어 갚겠다는 모양새로 받아들여졌다. 당연히 주가는 폭락했고 금감원이 제동을 걸자 돌연 증자 계획을 철회해버렸다. 최 회장 스스로도 이사회 의장직에서 물러나겠다고 밝혔고, 고려아연 내부는 어수선하다. 

    물론 재판부에 이런 상황까지 예견해가며 판결을 내리라고 요구할 수는 없다.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가처분을 기각하면서 최소한 진흙탕으로 가는 길을 열어주긴 했다는 사후 평가가 나오고 있다. 14일 MBK는 기각된 이전 가처분 신청의 본안 소송 격으로 고려아연 이사들을 상대로 주주대표소송을 제기했다. 이전 판결에서 다뤄지지 않은 쟁점들은 이번 본안 소송을 통해 가려질 전망이다. 

    법무법인 한 관계자는 "배임 혐의가 짙다는 게 시장 전반의 지배적 의견이었고, 고려아연이 사후적으로 이를 입증하는 구도가 됐다"라며 "재판부도 고려아연이 유상증자까지 나설 줄은 몰랐겠지만, 처음부터 강경하게 판단했다면 일이 이렇게 꼬이진 않았을 것이라고 본다"라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