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차 닮아가는 HD현대…정기선 '수석부회장' 능력 입증은 이제부터
입력 24.11.29 07:00
Invest Column
HD현대그룹에 처음 등장한 수석부회장
정기선 체제, 색채 입히기 본격 돌입할 듯
  • HD현대그룹이 한국 재계에선 다소 생소한 '수석부회장' 직함을 신설했다. 외국계 그룹에선 'Executive Vice President(EVP)'의 직급을 단 인사들을 종종 볼 수 있으나, 우리나라에선 현대차그룹과 SK그룹 외엔 딱히 찾아보기 힘들다.

    범(汎)현대가인 현대차그룹을 본다면 회장과 부회장 그 사이에 존재하는 수석부회장은 대관식을 앞둔 예비 총수의 교두보와 같은 직급이었다. 아버지의 그늘 아래, 사업적으로나 재무적으로 사실상 그룹의 전권을 쥐고 최고경영자(CEO)로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자리였다.

    성과는 오롯이 수석부회장에게 돌아가지만, 부진한 사업과 적체된 인사로 인한 과오(過誤)는 선대의 것으로 치부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부여됐다. 분기마다 성과를 평가받고, 매 연말 내년을 기약할 수 없는 전문경영인들에겐 허락되지 않는 자리다.

    공식적으로 차기 총수에게 주어진 절호의 기회인 셈이지만 사실 그 무게감도 만만치 않다.

    불과 2~3년의 짧은 시간안에 아버지의 가신(家臣)과 본인만의 믿을 수 있는 보좌진을 구분해야 하고, 요직 인사를 통해 조직을 장악해야 함은 물론 임직원들의 신임을 얻어야 하는 과제가 남아있다.

    주주와 투자자들에게도 예측 가능한 그룹의 방향성을 제시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혼란한 상황을 틈타 외부의 공세가 시작할 수도 있다. 대기업을 향한 자본가들의 공격이 본격화 한 현재,  이미 우리나라 재계는 초긴장 상태다.

    본인 스스로 그 어떤 구설에 오르지 않도록 성찰해야 함은 기본이다. 이는 수십만명의 생계를 책임지는 오너 경영인으로서의 책무이자, 신의성실을 원칙으로 하는 주식회사 최고경영진의 기본 자질이기도 하다.

    성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사업 방향성이 뚜렷해야 하고, 안팎에서 오롯이 새로운 총수의 업적으로 인정받아야 한다.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서 소방수로 등장하는 것이 아닌 이상, 잘 달리는 기업을 더 잘나가는 기업으로 변모시켜야 한다.

    그룹의 주력인 조선업의 슈퍼사이클을 맞아 HD현대그룹은 순항중이다. 올해는 국내 증시 초대형 기업공개(IPO)로 꼽히는 HD현대마린솔루션 상장에 성공했고, 신사업 HD현대일렉트릭의 실적은 고공행진하고 있다.

    조선업의 호황, 트럼프 미국 행정부의 출범을 앞두고 한국 조선사들에 대한 주목도가 높아지고 있는 시점, 그룹 차원에서도 경영권 승계의 최적기가 다가왔다는 판단이 깔려있었을 것이다.

    물론 호재만 가득 쌓여있는 건 아니다.

    현 정부의 최대 수혜기업이자 글로벌 방산기업으로 자리를 잡아가는 한화그룹의 경쟁구도는 중장기적으로 부담이다. 최근 한화오션이 KDDX 입찰과 관련해 HD현대중공업을 향한 고발을 취하하며 두 그룹간의 해빙 무드가 조성되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앞으로도 두 그룹은 세계 각지의 수주전에서 전면전을 펼칠 수밖에 없는 라이벌 관계임에는 변함이 없다. 

    재계에서 영원한 적도 영원한 동지도 없다고는 하지만, 전세계를 무대로 한 글로벌 기업들에 HD현대중공업이 주장하는 ‘팀코리아’ 전략이 과연 유효할지는 생각해봐야 한다. 물론 김동관 부회장, 정기선 수석부회장의 두터운 친분과는 별개 문제다.

    현대중공업에서 뿌리를 내린 사실상 오너급 전문경영인으로 평가 받는 권오갑 회장의 그늘에서 벗어나, 정 수석부회장만의 색채를 입힌 경영전략을 어떤 방식으로 드러낼지는 지켜봐야 한다. 

    앞으론 그룹의 모태인 조선업 외에 정 수석부회장이 집중해온 인공지능(AI), 친환경·디지털 기술 등 신사업에서 냉정한 평가가 이뤄질 가능성이 높다. 그룹의 숙원사업과도 같은 HD현대오일뱅크의 기업공개 성사 여부 역시 정 수석부회장의 체제 하에서 이뤄낼 수 있을지 관건이다.

    그룹 차원의 랜드마크 M&A를 통해 미래먹거리를 앞장서 챙기겠단 의지를 피력할 수도 있다. 삼성 이재용 회장, 현대차 정의선 회장 역시 2인자 시절 신사업 확장과 대규모 M&A를 통해 본인의 입지를 굳히려는 노력이 있었다. 물론 시행착오도 있었다.

    정 수석부회장은 HD현대, HD한국조선해양, HD현대글로벌서비스, HD현대중공업 등의 계열사에서 경영, 지원 등의 역할을 두루 맡았다. 그룹의 핵심인 조선업의 침체와 호황기를 모두 경험해 본 경력도 무시할 수 없는 장점이다.

    HD현대그룹에서 정기선 수석부회장 체제가 자리를 잡아갈수록, 경영권 지분 승계에 대한 방식과 전략이 주목받을 공산이 크다. 정 수석부회장은 이미 2018년 정몽준 아산재단 이사장으로부터 자금을 증여 받았고, 이를 바탕으로 매년 지분을 늘리는 ‘정공법’을 택하고 있다.

    다행히 정기선 수석부회장에겐 모법 답안지가 있다. 

    재계에서 가장 경직되고 폐쇄적이라고 평가받던 현대차그룹은 정의선 회장의 체제가 들어선 이후 180도 달라졌다. 그룹의 인사, 전략, 조직문화는 정의선 회장이 수석부회장으로 재직하던 시절부터 바뀌기 시작했는데, 지금은 여느기업보다 빠르게 변모하는 기업이 됐고 이는 실적으로 증명이 됐다. 지배구조 개편은 아직도 풀지 못한 숙제이긴 하지만, 현대차그룹은 정기선 회장에겐 최고의 해설집이 될 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