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핵 정국에 韓보다 '더' 놀란 글로벌 시장…"탄핵 장기화, 내년 하방리스크 위험"
입력 24.12.10 07:00
"과거 탄핵 때와 지금은 다르다" 글로벌 IB '엄중 경고'
원화 회피에 환율상승ㆍ국가신용등급 압력 거론
한국 오피스들 "본사에 '안전한 한국' 설명 어렵다" 난색
탄핵 정국 장기화 조짐…정부 비상대책 통할지는 미지수
  • 비상계엄 사태와 탄핵 불발이 한국경제 전반에 먹구름을 드리우기 시작했다. "금방 정상화될 것"이라는 낙관론이 힘을 잃고 탄핵국면 장기화에 따른 경기 침체를 예고했다. 

     '안정적인 투자처' 로 인식됐던 한국의 대외 신인도에 충격이 가해지면서 글로벌 투자은행과 애널리스트들은 앞다퉈 "내년 한국경제에 하방 리스크가 크게 작용할 것"이란 우려를 조심스레 내비치기 시작했다. 

    글로벌 IB들ㆍ애널리스트들 "내년 한국경제 위험" 전망 시작

    글로벌 투자은행(IB) 골드만삭스는 9일 '짧은 계엄령 사태의 여파’란 리포트를 내며 "내년 한국 성장률 전망치를 시장 평균보다 낮은 1.8%로 유지하지만 리스크는 점점 더 하방으로 치우치고 있다"고 내다봤다.

    권구훈 골드만삭스 선임이코노미스트는 "정치적 불안정성이 성장에 의미 있게 영향을 미치지 않았던 2016년과 2006년의 두 건의 탄핵 사건 때와는 다르다"고 평가했다. 그는 "앞선 두 사례에서 한국 경제는 2006년 중국 경기 호황과 2016년 반도체 사이클의 강한 상승세에 따른 외부 순풍에 힘입어 성장했다"며 "반대로 2025년 한국은 수출 중심의 경제구조를 지닌 국가들과 함께 중국 경기 둔화와 미국 무역 정책의 불확실성으로 인한 외부 역풍에 직면해 있다"고 짚었다.

    경제를 둘러싼 대내외 여건이 더욱 취약하다는 점에서 부정적인 파장은 더 클 것이란 관측인 셈이다. 

    단기적으로는'관리인(caretaker) 정부'가 금융 시장과 거시경제 안정성 확보•유지에 힘쓰며 기존 정책을 시행하는 데 중점을 둘 것으로 예상했다. 다만 권 이코노미스트는 국민연금의 대규모 해외자산 보유액이 과도한 시장 불안과 원화 가치 급락 발생 시 증권·외환시장을 지원하는 데 사용될 수 있고, 통화·재정 정책 여력도 충분하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야당의 추가 탄핵안 발의와 과도기적 내각 구성, 개헌 논의 등을 주목해야 할 주요 이벤트로 꼽았다.

    앞서 글로벌 신용평가사인 피치(Fitch Ratings)는 6일 보고서를 통해 “당사의 기본 시나리오는 일련의 사태들이 한국 사회 구조의 근간을 훼손하거나 지속적으로 악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고, 신용등급(AA-) 부여 근거인 경제와 대외 금융 환경에 위협이 되지 않을 것으로 판단한다”라며 “그러나 지속적인 재정적자와 이로 인한 정부부채 증가 추세가 이어질 경우, 재정은 한국 신용등급에 중기적으로 하방 압력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다. 

    피치 역시 “한국 경제는 이미 미국의 보호무역주의, 국내 부동산 경기 약화 등 여러 리스크에 직면해 있고 정치적 리스크는 이미 크게 하향 조정된 경제 전망치에 또 다른 하방 리스크가 될 수 있다”고 내다봤다. 

    노무라증권은 최근 보고서를 통해 한국의 정치 불확실성이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며 원·달러 환율이 내년 5월 1500원까지 상승할 것으로 전망했다. 정치적인 특수 상황 외에도 각종 대외여건 악화가 원화값을 짓누르고 있다는 분석이다. 특히 내년 1월 출범하는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 압박이 커질 경우 중국 위안화 가치가 떨어지면서 원화도 동반 하락할 것이란 관측도 제시했다. 

    뱅크오브아메리카도 비슷한 전망을 내놨다. BofA증권의 아다르쉬 신하 아시아 금리·외환 전략 공동책임자는 정치적인 요인도 있지만 한국의 경제 펀더멘털 약화가 더 큰 문제라면서 원달러 환율이 내년 1분기 내에 1450원까지 오를 수 있다고 전망했다. 

    컨설팅 업체인 유라시아그룹은 8일 보고서에서 기획재정부와 한국은행이 더 불안정한 위기를 막더라도 "정치적 마비는 이미 성장 둔화로 어려움을 겪는 경제에 타격을 줄 것"으로 내다봤다. 

    이밖에도 싱가포르의 인터치 캐피털 마켓의 션 캘로우 수석 외환 애널리스트는 당국의 투자자 심리 안정 노력에도 불구하고 "탄핵 표결 불성립에 대한 일부 실망감이 있을 수 있다"며,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과 관련된 리스크로 인해 원화의 근본적인 추세는 여전히 하락세라고 블룸버그에 말했다.

    국내 증권사들도 우려에 가세했다. 신한투자증권은 9일 '탄핵 정국과 금융시장 영향' 보고서에서 현재의 정치 상황과 시장 영향을 시나리오별로 3단계로 구분하고, 최악의 시나리오에서는 달러-원 환율이 1450원선을 웃돌 것으로 전망했다.

    성장동력을 잃은 상태에서 계엄과 탄핵정국이 시작된 것이 더 큰 문제라는 지적도 나왔다. 한 국내 증권사 연구원은 "글로벌 IB 리포트 등을 모니터링 하고 있지만, 단기 변동성 확대나 투자비중 축소 등 당연한 분석들"이라며 "오히려 국내 하우스들은 밸류업 동력이 상실된 점에 집중하고 있는데, 반도체는 이미 상황이 좋지 않았고 금융주가 밸류업 최대 수혜주인데 주가가 하락하고 외인의 이탈폭도 예상보다 커서 예상보다 우려가 더 크다"고 말했다. 

    쿠데타로 해외 투자자산 손실 본 경험 있는 해외 하우스들, 사태 무겁게 봐

    글로벌 투자회사들의 한국 오피스 임직원들은 이날도 해외 본사에 국내 상황을 브리핑하는데 여념이 없는 상황이다. 

    한 글로벌 투자사 관계자는 "비상 계엄이 터진 이후로 글로벌 본사와 계속 연락하고 있는데, 최고 경영진도 상황에 대해 계속 물어오는 등 한국 상황을 주시하고 있다"며 "투심을 방어하는 것이 중요하다보니 ‘국회의 빠른 대처로 안정이 됐고,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시스템은 살아있다’는 식으로 걱정을 불식시키고는 있지만, 이미 대외 신인도에 입은 리스크가 심각하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이어 "해외에선 아시아권에서 한국 시장이 일본과 함께 ‘안전’하다고 여겨졌는데 이번 일로 ‘어떻게 한국에서 이런 일이’ 놀란 분위기다. 일부 국가에 쿠데타가 일어나서 투자했던 자산이 곤란해진 경험이 있는 하우스들은 특히 우려가 깊다"고 말했다. 

    한 외국계 금융사 임원은 "글로벌 본사에서 한국 동향에 대해 계속해서 업데이트를 요구하고 있다"며 "크게 동요하고 있진 않지만 가까운 시일 내에 있던 글로벌 임원들의 한국 방문 계획이 연기되는 등 사태를 가볍게 보고 있지는 않다"고 말했다. 

    다른 해외 투자사 관계자는 "지금 해외에서 한국을 걱정하는 요인 중 하나는 '무정부상태'로 행정부 기능이 마비되는 것 아니냐는 점"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이른바 국가의 컨트롤타워가 부재한 상황이 이어지면 한국 투자를 하고 싶어도 못하게 될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는 우려인 셈이다. 

    "지금이 매수 타이밍이다" 평가도 있지만…지수ㆍ환율 등은 반대로 

    사태가 심상치 않게 흐르면서 금융당국은 우선 시장 안정에 총력을 기울인다는 방침을 보였다. 기획재정부는 9일 불안정해진 주식시장에 최대 4300억원 규모의 긴급 자금을 투입하겠다고 밝혔다. 기재부는 비상계엄 사태 이후 주가 하락을 막기 위해 이미 주식시장에 밸류업 펀드 중 300억원을 투입한 상태다. 이번주엔 700억원, 다음주엔 300억원을 순차적으로 투입하기로 했다. 다음주에는 3000억원 규모의 2차 펀드도 추가로 조성하기로 했다.

    채권시장에는 필요하면 국고채 긴급 바이백, 한은의 국고채 단순 매입 등을 즉시 시행하기로 했다. 외환·외화자금시장에는 필요하면 외화 환매조건부채권(RP) 매입 등을 통해 외화 유동성을 공급하기로 했다. 외환 유입을 촉진하기 위한 구조적 외환수급 개선 방안을 이달 중 발표하기로 했다. 금융위원회는 이번주 금융지주 회장까지 포함한 긴급 금융시장 점검회의를 개최하는 안도 검토하고 있다.

    대외신인도 하락을 막기 위한 조치에도 나선다. 국제신용평가사, 국제금융기구, 해외투자자, 주요국 재무장관, 글로벌 IB 등에 부총리 명의 서한을 보낸다. 국제기구와 주요국에 국제금융협력대사를 파견한다. 

    지금이 '반짝 리스크'일 뿐, 오히려 저점매수 타이밍이라는 평가도 있다. 한 연기금 CIO는 "내년 사업계획에서 탄핵 정국 때문에 중대한 변화를 줄 정도는 아니고, 상황을 지켜보면서 대응할 예정"이라며 "계엄 이전부터 한국 증시에 대한 걱정이 많았고 연기금들은 당장 비중을 줄이거나 늘일 수가 없는데, 오히려 일부 외국계 운용사들은 이 기회를 한국 주식 저점 매수 타이밍이라고 볼 수도 있다. 환율도 높아서 환차익도 기대가 가능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다만 시장상황은 녹록지 않다. '회복'보다는 '본격적인 하방리스크'에 주목하는 분위기다. 

    이날 코스피 지수는 2361.24, 코스닥 지수는 627.93으로 마감했다. 코스피는 장 개장과 동시에 급락해 2400선이 붕괴됐고 장중 상장 기업 10곳 중 4곳이 연중 최저가를 기록하기도 했다. 업종을 가리지 않고 하락세가 이어지면서 이날 코스피와 코스닥이 나란히 연중 최저치로 추락했다. 외인에 이어 개인 투자자의 이탈이 가속화한 영향으로 풀이된다. 연말 특수를 기대하던 여행·항공·면세점 관련주도 급락세를 겪었다.

    원·달러 환율도 탄핵 불발로 1,440원대를 위협했다가 1,430원대 중후반을 기록했다. 이날 종가는 주간 기준으로 2022년 10월 24일(1,439.7원) 이후 2년 1개월여 만에 가장 높은 수준을 기록했다. 원화 가치가 급락하면서 원/엔 재정환율은 오히려 오름세를 보였다. 100엔당 957.08원으로 이는 엔 캐리 트레이드 청산 가능성으로 세계 금융시장이 요동쳤던 지난 8월 5일(964.6원)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