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에 뭐 먹고 살지?'...퇴직연금에만 기대는 금융사들
입력 24.12.11 07:00
내년도 '저성장' 직면할 금융권, 새 먹거리 찾기 난항
"힘 싣는 만큼 성과 나와" 퇴직연금 사업에 쏠리는 눈
실물이전 도입으로 은행권 '수성', 증권사 '확장' 사활
'불확실성 확대, 은행에 기회?' 빈틈 노리는 금융사들
  • "라디오에서 퇴직연금 광고만 나오네요. 케이블은 물론 일부 지상파 채널에서도 퇴직연금 환승 광고가 심심찮게 보입니다. 상품 환매 없이 거래 금융사 이동이 가능한 '퇴직연금 갈아타기'가 시작된데다, 리테일ㆍ홀세일ㆍIB 공히 내년에 영업이 쉽지 않을 거란 위기의식 탓으로 보입니다." (한 대형증권사 금융 담당 연구원)

    퇴직연금이 금융업권의 주요 먹거리로 부상하고 있다. 내년도 금융산업의 성장 여력이 제한적인 환경에서 가시적인 성장을 기대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업부문이라는 게 업계 평가다. 퇴직연금 점유율 1위를 차지하고 있는 은행들이 '텃밭 지키기'에 나서는 한편, 증권사는 조직개편에서도 퇴직연금을 앞세우는 등 영토 확대에 사활을 걸고 있다.

    최근 한 달 새 은행과 증권사들은 퇴직연금 시장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치열한 마케팅 경쟁을 펼쳤다. 은행권은 가수 아이유, 안유진 등 유명 연예인을 브랜드 모델로 기용하는 등 대대적인 스타 마케팅에 나섰고, 증권사는 순입금액에 따라 백화점 상품권 등 경품을 제공하는 등 공격적인 고객 유치 활동에 나섰다.

    금융권이 이처럼 퇴직연금 유치에 사활을 건 이유는 지난 10월 30일부터 시행된 퇴직연금 실물이전 제도와 무관치 않다는 지적이다. 제도 시행으로 퇴직연금 자금의 업권별 이동이 가능해지면서 저성장에 직면할 것으로 예상되는 금융사들이 주된 '먹거리'로 퇴직연금을 낙점한 것이다.

    은행권에선 내년도 기준금리 인하로 이자이익과 비이자이익 등 핵심이익 증가세가 둔화할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특히 이자이익의 경우 가계대출 규제 등으로 대출을 늘리는 데 한계가 있는 상황에서 금리 인하로 마진이 하락하면서 전년대비 줄어들 수 있다는 전망까지 나오고 있다.

    비이자이익 전망 또한 그리 밝지 않다. 통상 시장금리가 내리면 유가증권 이익이나 수수료이익 등이 증가하지만, 투자 부문 위축은 불가피할 것이란 전망이 많다. 은행권 한 관계자는 "금리가 내려가면 은행들의 수익성이 떨어지는데, 은행에서 여분의 자금 운용 성격이 있는 IB투자 여력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라고 설명했다.

    그나마 대손비용이 안정화될 것이란 기대감이 내년도 실적 개선 전망을 뒷받침해 왔지만, 최근 계엄사태 이후에는 이마저도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란 관측이 많다. 지금과 같은 원달러 환율 상승이 지속될 경우 환리스크가 증가하면서 중소기업 등의 연체율이 상승할 가능성이 거론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같은 상황은 증권업계도 마찬가지다. ECM과 DCM 등은 전통적인 IB부문으로, 가시적인 성장을 예측하기가 어렵다. PF 시장 또한 올해보다는 나아진다고 하지만 호황기 시절만큼 증권사 이익을 뒷받침해주기는 쉽지 않을 것이란 전망이 지배적이다.

    반면 퇴직연금은 조직에서 힘을 실어주는 만큼 성과가 나올 것이란 게 증권업계 예상이다. 이같은 분위기는 올해 증권사 연말 인사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났다. 각 증권사들은 조직개편을 단행하면서 퇴직연금 사업부문에 힘을 실었다.

    미래에셋증권은 이번 인사에서 기존 연금M 1,2부문으로 나눠져 있던 연금사업부문에 연금혁신부문을 신설하고, 이를 연금RM 1,2,3 부문으로 확대 개편했다. 한국투자증권도 기존 퇴직연금본부를 퇴직연금 1·2본부 및 퇴직연금운영본부로 확대하는 한편, 산하 연금영업부도 5개에서 8개로 확대했다. 삼성증권은 마케팅 강화를 위해 퇴직연금본부를 자산관리부문에서 디지털부문으로 이관했다.

    중소형 증권사들도 퇴직연금에서 기회를 엿보고 있다. 현대차증권은 최근 조직 개편에서 리테일 본부 산하에 연금사업실을 신설해 퇴직연금 조직을 통합했다. 현대차증권 관계자는 "DC(확정기여형) 퇴직연금 및 IRP(개인형 퇴직연금) 경쟁력을 강화하려면 리테일과 연금사업실 협업과 시너지가 필수적"이라고 밝혔다.

    키움증권은 현재 신사업 TF 중 하나로 퇴직연금 TF를 가동하고 있다. TF는 지난 11월 미래에셋증권에서 퇴직연금 사업을 담당한 표영대 상무가 지휘하고 있다. 키움증권은 추후 WM부문 산하 본부로 이를 배치해 정규 조직화할 예정이다.

    증권사 한 관계자는 "퇴직연금 시장은 매년 두자릿수 이상 성장하는 몇 안 되는 시장"이라며 "수익률에 따라 타 증권사, 은행으로 바로바로 갈아타는 것이 가능해졌기 때문에 파이를 차지하려는 증권사들이 최소 10년 이상은 퇴직연금에 힘을 주는 현상이 이어질 것"이라고 밝혔다.

    각 업권은 퇴직연금 유치를 위한 마케팅을 지속하는 한편 업권별 자금 이동 추이 또한 면밀히 살피고 있다. 올해 3분기 말 기준 업권별 퇴직연금 점유율은 은행이 210조원(52.6%)으로 가장 많았고, 다음으로 증권이 96조5328억원(24.1%), 보험이 93조2654억원(23.3%) 순이다.

    10일 기준 은행권 퇴직연금 잔액은 실물이전 제도 시행 이전보다 다소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통상 연말에 은행권 DB 퇴직연금 잔액이 늘어난다는 점을 고려하면 실물이전 제도 시행에 따른 영향인지는 살펴봐야 한다는 평가다. 일부 증권사들도 자료를 통해 실물이전 제도 시행 이후 퇴직연금 이전 금액이 증가했다고 홍보했다.

    금감원은 아직까지 정확한 자료를 공개하지 않고 있다. 은행권과 증권업계가 제도 시행을 전후로 공격적인 마케팅을 펼쳤던 만큼 이러한 '마케팅 효과'가 제거된 이후에야 정확한 추세를 확인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금감원은 이르면 내년 1월 즈음에 업권별 퇴직연금 현황을 발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한편 업계는 비상 계엄사태로 불확실성이 커지자 관련 영향에도 촉각을 기울이고 있다. 수익률이 더 높은 증권사로 자금 이동을 우려했던 은행권에서는 기대감도 나온다. 이번 사태로 주식시장 변동성이 커지면서 원리금 보장상품의 수요가 커질 수 있다는 점에서다. 적어도 증권사로의 자금 이동은 막을 수 있지 않겠냐는 것이다. 

    은행권 한 관계자는 "은행은 원리금 보장형 상품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수익률 제고를 원하는 고객들은 증권사로 자금을 옮길 것이란 예상이 많았다"라며 "다만 주식시장 불확실성이 장기화하면서 주가가 하락할 위험이 큰 상황에서는 원리금 비보장 상품보다는 원리금 보장 상품을 찾는 고객들이 더 늘어날 수 있다"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