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수자 찍어놓고 거래하는 대기업들…들러리 신세·출혈경쟁 걱정해야 할 PE들
입력 25.01.23 07:00
원매자 정해두고 진행하는 거래 늘어
종결 확실성·신속성·비밀유지 등 장점
PEF 돈 많지만 모두 기회 잡긴 어려워
거래 위해 고가 인수·들러리 신세 감수
  • 대기업들이 사모펀드(PEF)를 유력한 원매자로 정해두고 사업조정 거래를 진행하는 사례가 많아지고 있다. 거래 종결의 확실성이 담보되고 잡음이 나올 가능성도 줄어들기 때문이다. 오너 일가가 신뢰하는 파트너와 함께한다면 기업과 실무자 입장에서도 부담이 덜하다.

    이런 유대관계가 없는 PEF는 대기업 거래를 따내기 위해 부담을 감수해야 한다. 주인이 정해진 거래에서 들러리를 서거나, 몸값을 맞추기 위해 페이스메이커 역할을 맡기도 한다. 다음에 좋은 거래를 위해 원하지 않는 자산을 받아야 할 수도 있다.

    대기업들은 올해도 사업조정과 경영 효율화 작업을 이어가야 한다. 기업끼리 자산을 주고받을 수는 없고, 은행들에 돈을 빌리기도 쉽지 않다. 결국 PEF에 대한 의존도를 높여야 하는데 최근 일부 거래는 초기에 이미 원매자가 정해진 모습을 보였다.

    SK그룹은 작년 9월 SK스페셜티 매각 예비입찰을 진행했다. 한앤컴퍼니와 큰 틀에서 거래에 합의한 후 공개 매각 절차에 나선 터라 우량 자산임에도 시장의 관심은 크지 않았다. 전방산업 부진 속에 협상이 예상보다 길어졌을 뿐 별다른 이변은 없었다.

    SK넥실리스 박막사업(어펄마캐피탈), SK엔펄스의 CMP패드사업(한앤컴퍼니) 등 거래도 그룹과 관계를 맺어 왔던 PEF들이 우선권을 가져갔다. SK E&S의 보령 블루수소 사업 파트너 역시 일찌감치 브룩필드자산운용으로 정해져 있었다.

    CJ제일제당의 바이오 사업은 MBK파트너스가 유력한 인수 후보다. 애초 수조원대 자금력과 중국 시장에 대한 전문성을 가진 MBK파트너스에 기대 매각에 나섰다는 평가가 나온다. 다른 원매자에 대해선 매각 일정도 촉박하게 제시된 것으로 알려졌다.

    대기업 입장에선 미리 거래 상대를 낙점해 두는 것이 편하다. 공개 경쟁입찰에 나서면 거래 당사자가 늘어나기 때문에 잡음이 일거나 정보가 유출될 위험성이 커진다. 대부분 고용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에 일찍 소문이 나면 거래 난이도가 올라간다.

    일부 거래는 대기업 오너와 PEF간 신뢰에 기반해 이뤄진다. 기업은 파트너에 좋은 기회를 우선적으로 제공하고, PEF는 기업의 가려운 곳을 긁어줄 '적정 몸값'을 제시하니 윈윈이다. 실무자들끼리 얼마 안되는 금액을 조정하려 진을 빼지 않아도 된다. 부득이한 경우 시장 상황을 살펴 거래 명분을 쌓거나, 가격 조정 장치를 넣으면 된다.

    한 M&A 업계 관계자는 "괜히 공개 절차를 진행해서 구설에 오르는 것보다는 확실한 PEF 파트너를 미리 찍어두고 거래를 하는 편이 속도나 확실성, 편의성 면에서 유리하다"고 말했다.

    모든 PEF에 이런 기회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PEF들은 쌓아둔 자금은 많지만 막상 한국에서 투자할 만한 곳은 잘 관리된 대기업 자산 뿐이다. 자연히 PEF들의 투자 경쟁은 치열해지고, 대기업의 눈에 들기 위한 부담스러운 수를 둘 수밖에 없다. 가격을 크게 높이거나 원치 않는 자산을 받아오는 식이다.

    어피너티에쿼티파트너스는 작년 SK렌터카 인수에 성공했다. 다른 PEF가 앞선 거래란 평가가 있었는데 과감한 수로 이를 뒤집었다. 별다른 조정 장치 없이 경쟁자를 훌쩍 넘는 몸값을 제시하며 SK그룹과 관계를 맺는 데 성공했다. 어피너티는 이 전략을 롯데렌탈 인수 때도 그대로 활용했다. 시장 전망을 아득히 넘는 몸값에 다른 PEF들은 경쟁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대기업과 PEF간 역학관계를 잘 아는 자문사가 중간에서 이를 활용하기도 한다. 일부 거래에선 이미 유력한 원매자가 정해져 있음에도 적극 마케팅을 하는 경우가 있다. 경쟁을 부추겨 최종 몸값을 더 높이기 위해서다. 이런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PEF는 나도 모르게 거래의 '들러리'가 돼 의미없는 비용을 지출할 수도 있다.

    PEF들은 일부 흥행이 부진한 거래에서 몸값을 올리기 위한 '페이스 메이커' 역할을 제시받거나, 골치 아픈 자산을 인수해달라는 요구를 받는 경우도 있다. 편의를 봐주면 다음에 좋은 자산을 받아갈 기회를 주겠다는 것이다. 다만 이는 PEF가 투자 철학을 뒤로 하고 기업에 예속된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한 PEF 업계 관계자는 "대기업 관련 거래에선 나중에 알고 보니 이미 인수자가 내정돼 있거나 나도 모르게 들러리를 섰던 경우가 있었다"며 "어려운 거래의 입찰에 참여해 달라거나 안 좋은 자산을 받아달라는 제안을 받기도 하지만 대기업의 편의만 봐주는 꼴이 될 수 있어 조심스럽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