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건설, 현대家 정통성 상징 언제까지 유지할 수 있을까
입력 25.02.05 07:00
정몽구 회장 시대 주력 자회사
현대차그룹 편입 이후 23년만에 적자전환
잡음 많은 정비사업에서 수주 1위인 현대건설
미수금 늘어난 해외사업 확장한 현대ENG
정의선 시대, 정통성 상징이 여전히 유효?
  • 현대건설은 범(汎)현대그룹의 역사와 궤를 같이 한다. 국토를 종단하는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하고, 중동의 모래바람을 최초로 뚫은 우리나라의 건설 산업의 역사로도 여겨진다.

    현대건설을 품고 있는 곳은 재계 2위 현대차그룹이다. 2000년도에 벌어진 '왕자의 난' 이후, 현대그룹과 현대차그룹은 계열분리됐다. 이후 현대건설은 채권단 손에 넘어갔다. 인수전에선 현대그룹과 현대차그룹이 맞붙어 숱한 뒷이야기를 남겼고 결국 2011년 현대차그룹이 인수했다.

    현대차그룹 품에 안긴지 23년만에 현대건설은 대규모 적자를 기록했다. 

    정몽구 회장 시대엔 '쇳물에서 완성차까지'란 수식어를 위해 그룹에 반드시 필요한 자회사, 또 현대가 정통성 확보를 위해 그룹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였으나 이젠 그 위상이 점점 위태로워 지고 있다. 정의선 회장 체제가 공고해진지 5년째. 현대건설이 잘 달리는 현대차그룹의 고민거리로 전락할 수 있단 지적도 나온다.

    현대건설은 최근 1조2000억원 규모의 연간 영업적자를 발표했다. 시장의 전망치를 크게 밑도는 '어닝쇼크'였는데, 자회사인 현대엔지니어링의 해외 손실이 발생한 결과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건설사이자 국내 주택 정비사업 독보적 1위(현대건설), 해외 사업에 여느 건설사보다 강점을 가진 건설사(현대엔지니어링)가 내놓은 처참한 성적표에 업계 전반에 위기감이 확산하기 시작했다.

    회사측은 회계장부에 손실을 일시에 반영하는 '빅배스(Big Bath)는 아니다'란 해명을 내놨다. 그러나 투자자들은 빅배스 여부보단 '대규모 손실' 자체에 주목하는 분위기이다.

    현대엔지니어링은 지난해 주우정 전 기아 최고재무책임자(CFO)를 사장으로 승진 발령해 대표이사로 선임했다. 현대차그룹에서 재무통이 주요 요직을 차지하는 건 흔한 일이다. 다만 정의선 회장의 확실한 '믿을맨'으로 분류되는, 또 현대차그룹에서 가장 뛰어난 성과를 낸 CFO가 대표이사로 선임된 이후 발표한 대규모 손실이란 점에서 빅배스 논란에 불이 붙었다.

    실적발표 이후 현대건설의 주가는 급등했다. 대규모 손실처리와 동시에 올해 비교적 높은 실적 전망치를 함께 제시한 게 주효한 것으로 보인다.

    금융투자업계 한 관계자는 "현대건설은 단 한번도 손실 처리를 강하게 한 적 없는 회사이다"며 "대규모 손실처리를 하고 높은 실적 전망치를 제시한 건 이미 어느 정도 준비가 돼 있다는 걸 의미한다"고 말했다. 

    국내 신용평가사, 증권사를 비롯한 금융기관들은 현대건설과 현대엔지니어링에 대해 기존보다 보수적인 접근을 예고한 상태다.

    투자금융업계 한 관계자는 "회계에 대한 신뢰도가 훼손된 이상 사업적으론 보수적으로 보는 게 맞다고 본다"며 "빅배스 유무와 상관없이 다른 해외 사업장에서도 손실이 나지 않을 것이란 보장은 어렵다"고 말했다.

    다른 증권사 관계자는 "올 상반기에도 마진이 좋지 않은 프로젝트의 준공이 예정돼 있기 때문에 빠른 회복은 기대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현대엔지니어링에 대해 한국기업평가(한기평)는 신용등급 전망을 '긍정적'에서 '부정적'으로 조정했고, 같은 날 나이스신용평가 역시 '하향 검토 감시 대상'에 등재했다.

    물론 대규모 손실을 털어내고 실적이 반등할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다. 국내외 건설 업황이 불확실하단 점은 물론 변수로 작용한다.

    실적의 턴어라운드와 불확실한 전망 등을 차치하고, 과연 현대차그룹 내에서 현대건설의 위상과 존재감이 유지할 수 있는가는 다른 차원의 얘기이다. 

    주택 사업, 특히 도시 재정비 사업의 특성상 조합과의 갈등이 끊이질 않는 게 현실이다. 갈등을 빚는 과정에서 그룹사의 신뢰도와 이미지에 적지않은 타격을 입히는 경우도 많다. 

    삼성그룹은 과거 이재용 회장이 국정농단 사태로 재판을 받을 당시 삼성물산의 재정비 사업 수주를 잠정 중단했는데, 이는 크고 작은 잡음들로 인해 그룹사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최소화하기 위한 조치였다. 브랜드평판 1위 래미안의 철수설까지 돌았을 정도로 건설 사업을 바라보는 그룹 차원의 시각이 우호적이지만은 않았단 평가를 받는다.

    현대건설의 경우엔 서울 강동구 둔촌주공(올릭픽파크포레온) 재건축 사업장, 서울 은평구 대조1구역(힐스테이트 메디알레) 재건축 사업에서 공사를 일시 중단한 사례가 있다.

    현대건설은 지난해 도시정비사업에서 총 6조원이 넘는 규모의 수주를 기록해 6년 연속 1위 자리를 지키고 있는데, 정비사업 수주 1위란 타이틀보단 앞으로 조합과의 갈등이 불거지는 사업장이 늘어날 것이란 우려가 더 크게 부각되고 있다. 최근의 공사중단 사태는 수주에 사활을 걸었던 한남4구역과 같은 초대형 사업장의 수주 경쟁에서 패배한 요인중 하나로 꼽히기도 한다.

    건설업계 한 관계자는 "현대건설이 재정비 사업 수주를 가장 잘 한다는 것은 부정하기 어렵지만, 앞으로 막대한 규모의 수주 사업장에서 조합과의 갈등없이 끝까지 공사를 마무리할 수 있는지는 지켜봐야 한다"고 말했다.

    해외 사업 수주가 강점인 현대엔지니어링 역시 불안하긴 마찬가지이다. 지난 2019년을 기점으로 미청구공사채권은 매년 늘어나는 추세다. 지난해 3분기 기준으로 1조6000억원이 넘는 공사 미수금도 보유하고 있다. 대규모 손실처리의 효과가 언제 어떻게 나타날지는 예단하기 어렵지만, 해외사업의 잠재적 부실을 명확하게 예측하기 어렵단 점은 변수로 남아있다.

    현대엔지니어링은 우리나라 사업장에서도 크고 작은 사건 사고에 휘말려 있다. 국토교통부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3~8월간 세부하자판정건수가 가장 많은 건설사로 꼽혔고, 지난해 말엔 시공을 맡은 울산 전기차 전용공장 건설현장에서 노동자 사망사고가 발생하기도 했다. 

    현대엔지니어링은 과거 한 차례 기업공개(IPO)를 시도했으나 실패한 전례가 있다. 현대엔지니어링 상장은 정의선 회장이 지분 11.7%를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승계 자금 마련과 맞닿아 있는 회사이지만, 현재로선 IPO 추진이 불투명하단 평가가 지배적이다. 이미지 개선 그리고 수익성 개선이 가시화하지 않으면 재차 추진하기엔 무리가 있단 평가도 나온다.

    과거엔 현대차그룹 차원에서 건설사를 전략사업으로 활용할 만한 카드가 많았다. 특히 사우디아라비아의 네옴시티 사업 등 해외 대규모 사업장에서 현대차그룹은 현대건설을 중심으로 인프라 사업 등 스마트시티 건설에 주력할 것으로 전망돼 왔다. 하지만 이런 기대감은 이미 사그라든지 오래다. 전기차 시대 전환에 집중해야 하고 대미(對美) 투자 확대가 절실한 상황에서 현대건설과 현대엔지니어링을 중심으로 한 인프라 사업 투자는 순위가 다소 밀리고 있단 평가도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