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이 해외 투기자본의 공격을 이겨내려면
입력 2015.06.25 07:00|수정 2015.06.25 07:00
    [Invest Column]
    대비할 시간 충분했지만 시간 보내며 '투기꾼' 타령만
    대주주 이득에 골몰하지 말고 경영승계 과정에서 다른 주주 이해에도 부합해야
    국민연금 '쌈짓돈'으로 여기지 말고 시장과 소통 필요
    • [06월24일 10:10 인베스트조선 유료서비스 게재]

      미국계 헤지펀드인 엘리엇매니지먼트(엘리엇)의 삼성그룹에 대한 공세가 예사롭지 않다. 엘리엇은 제일모직과 삼성물산간 불공정한 합병비율을 문제 삼아 소송을 제기한 데 이어 삼성물산 자사주를 KCC에 매각한 다음날 곧장 매각금지 가처분 신청을 냈다. 엘리엇은 삼성의 대응 시나리오를 뻔히 예상하는 듯 보이지만 삼성은 합법적 절차만 강조하며 끌려 다니는 모양새다. 삼성그룹 안팎에선 그 동안 엘리엇이 페루와 콩고, 아르헨티나 정부는 물론 코닝, 델파이 같은 세계적 기업에 시비를 걸어 막대한 돈을 챙긴 투기세력이라는 주장도 펴고 있다.

      '엘리엇=투기꾼, 삼성=희생양'이라는 이분법적 구도는 구태 의연한 스펙트럼이다. 엘리엇이 투기꾼이라고 하자. 삼성 지분인수 과정에서 각종 파생상품을 매입해 이미 수천억이 넘는 뒷돈을 챙겼을 수도 있다. 그렇다 해도 금융시장에서 투기꾼이 존재하는 것을 문제 삼을 수는 없다. 국내 수많은 단타 매매자들이 존재하는데 해외 국적이라는 이유로 '먹튀'라는 주장도 억지스럽다. 한국이 글로벌 경제시스템을 지향하는 한 이들 모두 시장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과거 소버린이 SK그룹의 지배구조 문제를 제기했고, 칼 아이칸은 KT&G의 배당정책에 시비를 벌이기도 했다. 중요한 점은 투기세력이 활개치지 못하도록 빈틈을 주지 않는 것이다. 삼성은 엘리엇이 지분을 야금야금 사들일 여지를 주었고 충분한 시간이 있었지만 별다른 대비책을 세우지 않았다.

      삼성그룹은 지난해 삼성SDS와 제일모직 기업공개(IPO) 작업으로 시장의 유동성을 쓸어 담았다. 두 회사의 공모총액은 2조6826억원. 작년 IPO 시장규모(4조7332억원)의 절반(57%)을 웃돌았다. 당시 IPO가 대성공을 거둔 것은 회사 펀드멘탈에 기인하기 보다 삼성그룹 지배구조 조정에 대한 시장의 기대치 때문이었다. 삼성을 믿은 국내외 기관이나 개인들이 상당수 참여했고 이 과정에서 돈 냄새를 맡은 엘리엇 같은 '행동주의 투자자'들이 몰려들었다. 하지만 삼성은 축배를 드는데 급급했다. 삼성물산이 다음 타켓이 될 것이라는 수많은 추측에도 삼성은 늘 함구해왔다.

      엘리엇이 문제 삼고 있는 합병비율(제일모직 1, 삼성물산 0.35)이 국내법상 불법은 아니지만 오해살 여지가 많다. 한국 자본시장법상 합병비율은 실제 기업 가치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어서 경영진이 개입할 여지는 충분하다. 주가산정을 언제 하느냐에 따라 대주주의 이득은 극대화되고 나머지 주주들은 손해를 볼 수도 있다.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기업가치가 역전된 시점인 지난 5월말 전격적으로 합병을 발표, 빌미를 제공했다. 삼성물산 경영진은 시장에서 궁금해 한 해외 사업(호주 건설사업 적자규모)에 대한 제대로 된 정보를 제공하지 않았다. 회사 가치가 하루가 다르게 하락하는 동안 자사주 매입은 커녕 그 어떤 부양의지도 보이지 않았다. 해외 투자자 이외에도 엘리엇의 주장에 동조하는 국내 수천명의 소액 주주들이 존재하는 것도 이 같은 연유에서다.

      막상 엘리엇의 공격이 드러나자 최치훈 삼성물산 사장은 해외 투자자들을 설득하러 동분서주 하고 있다. 하지만 그 동안 최사장을 비롯해 삼성 금융 계열사 사장들은 국내외 기관투자자들을 만나는 것을 외면해왔다. 한때 삼성전자와 같은 금융회사를 키우기 위해 삼성생명, 증권 등에 외부의 외국계 전문가를 대거 수혈하는 노력을 기울였지만 지금까지 살아남은 사람은 손에 꼽아야 할 정도다. 삼성그룹 대부분의 계열사들은 삼성전자 출신들이 장악했으며 금융은 항상 차순위로 여겨졌다. 삼성생명(김창수 1982년 삼성물산)을 비롯한 화재(안민수 1982년 삼성전자), 증권(윤용암 1979년 삼성물산), 카드(원기찬 1984년 삼성전자) 등 주요 금융 계열사 대표들은 수십년 동안 삼성전자나 물산에 근무한 삼성 공채 출신들이다. 이러한 인사 관행이 되풀이 되면서 금융시장과의 괴리는 한층 커져갔다. 국내 주요 금융지주 회장들이 국민연금을 비롯한 국내외 투자자들을 만나는 일을 일상적인 업무로 여기는 것과는 매우 대조적인 행보였다.

      이번 합병 여부를 결정할 국내외 투자자들은 삼성그룹의 지배구조 개편작업이 오너 일가의 경영권 승계를 위한 것이라는 인식이 여전하다. 이들은 삼성이 해외 투기세력에게 일방적으로 유린당할 위기에 놓인 선량한 기업으로 동정하지 않는다. 한데도 삼성은 안정적인 경영권 승계가 모든 주주들에게 득이 된다고 '정공법'으로 설득하는데 인색하다. 어찌될지 모를 추상적인 계열사간 합병 시너지와 시세차익을 노리는 투기세력의 실태 타령만 되뇌이고 있다. 당장 내년에 삼성물산 사장을 계속할지 조차 모르는 사람을 해외에 급파한다고 해결될 문제는 더욱 아니다.

      물론 엘리엇 처럼 시세차익을 바라는 투자자들의 의견대로만 기업을 경영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대주주나 경영진이 객관적이지 않은 경영판단을 해야 할 상황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해도 그런 결정이 다른 주주들의 이해에 얼마나 부합하는지 열심히 설득해서 지지를 이끌어내야 한다. 수많은 국민들이 투자를 한 곳인데 배당에 인색해서도 결코 안 된다. 국부펀드도 아닌 국민연금을 '쌈짓돈'으로 여기는 것은 더욱 곤란하다. 이재용 부회장은 지난해부터 시작된 일련의 상속 과정에서 한국 주식시장 전체에 빚을 졌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시장과 제대로 된 교감도 없이 대주주의 이익 극대화에만 몰두한다는 인상을 지우지 못할 경우 제2, 제3의 엘리엇에게 삼성은 매우 좋은 먹잇감이 될 것이다. 애초부터 제일모직과 삼성물산 주주들에게 공정한 대접을 했으면 투기세력들은 활개칠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