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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의 난', '쿠데타', '왕권다툼'. 여러 수사(修辭)가 등장했다. 그 중 가장 냉정한 표현은 '승계 분쟁'으로 보인다. 로이터(Reuter)나 파이낸셜타임스(FT)같은 외신들도 유사한 표현('Succession Battle')을 쓰고 있다.
결국 모든 이슈는 '장남이 물려 받느냐, 차남이 이어 받느냐' 단 하나다. 나머지 진실게임은 전부 부차적인 이슈다.
문제는 승계하려는 대상이 '가업'(家業)이 아니라 '기업'(企業)이라는 점이다.
이번 사태가 가족경영으로 수십년 일관하던 어느 변두리 식당의 장-차남간 승계분쟁이라면 별반 문제될 것이 없다. '누가 누가 이기나'라는 경마식 중계보도가 난무한다고 해도 탓할 게 못된다.
그러나 승계 대상이 한국 재계 5위 그룹이다. '삼성-현대차-SK-LG'에 이어 한국경제 먹거리의 한 축을 담당했던 그룹이다. 계열사수 80개, 자산총액 94조원대의 대기업 집단이다. 국내 및 해외 기관투자자들로부터 자금을 받고 주식을 나눠준 상장사만 9개인 곳이다. 영위업종만 봐도 식품, 유통, 화학 등 각 부문에서 국민생활과 가장 밀접히 연관된 곳들이다.
이런 그룹을 이끌 '리더'가 누가 되느냐는 단순히 '승계'나 '유산상속'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기업의 미래는 물론, 근로자들과 협력업체들과 금융회사들, 그리고 소비자들의 주머니 사정과 생활에 그대로 영향을 주는데다, 향후 나라경제의 풍성함까지 좌우할 중차대한 이슈다. '동네 맛집의 2대 사장이 누가 되느냐'와는 아예 차원이 다른 얘기다.
이런 사안을 결정하는 요인이라는 게 고작 "90세를 넘겨 이랬다 저랬다 변덕 부리는 창업자가 어느 아들 편이냐" , "창업자의 형제와 아내 혹은 장녀가 어느 아들을 더 좋아하느냐" , "직원 3명에 불과한 일본 포장업체의 지분율 분포가 어떠냐" , "실체도 드러나지 않은 일본 지주회사 주식을 누가 들고 있는지" 따위의 사소하기 짝이 없는 일들이다.
반대로 ▲롯데그룹을 믿고 계열사에 투자해 왔던 주주들 ▲롯데와 거래한 협력업체들과 금융회사들 ▲롯데그룹에 소속된 수많은 직원들과 ▲롯데그룹의 제품과 서비스를 이용한 소비자들은 아무런 입김도 내지 못한다. 오로지 '시게미쓰(重光)일족'이 벌인 내분의 결과만 지켜봐야 한다. 왕이나 쇼군(將軍)이 지배하는 조선왕조나 도쿠가와 막부 시절에서나 볼만한 일이 재현된다.
결국 우리는 '기업'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들은 아무리 규모가 커 본들 '일족'이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가업'으로 보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우리는 함께 성장해야 할 경제의 동반자라고 여기더라도 그들은 이를 하찮은 '재산싸움'으로 변질시켜 버렸다고 느끼게 된다.
그런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면서 나올 만한 반응은 하나 뿐이다. "장남이 받아 가든, 차남이 받아가든 그따위 남의 부자집 재산 싸움, 알게 무어냐".
비슷한 정서는 삼성그룹-엘리엇 사태때도 발생했다.
이재용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와 직결된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당시. "탐욕스러운 글로벌 헤지펀드에 대한민국 1등 기업이 흔들려서는 안된다"며 애국심을 자극하는 호소문이 한참 유행했다. 이에 인기 있던 반응 중 하나는 "이재용 부회장 집에 불이 난거지, 한국에 불이 난 것은 아니다".
국가경제를 좌우하는 삼성그룹의 위상과 중요성은 인정한다. '삼성그룹 = 한국' 이라는 등식은 어렴풋이나마 받아들일 수 있다. 하지만 '삼성그룹 = 이재용 부회장' 또는 '이재용 부회장=한국경제'라는 등식은 다른 얘기다. 결국 '오너 일가'의 손익계산서가 달린 문제였는데 이를 '국익'으로 포장해 놓은 것에 대한 차가운 반응이었다.
한국경제 '자존심'이라는 삼성에 대해서도 이랬는데 '한국기업이 맞느냐', '일본어를 쓰고 일본회사가 지배하는데 일본에 돈 벌어주는 일본회사 아니냐'며 '왜색(倭色) 논란'까지 일고 있는 롯데그룹의 저열한 승계 싸움에 대한 반응은 더 심할 가능성이 높다. 극단적으로 이 모든 사태가 끝난 이후, '승자'가 확정되었다고 한들. 이후부터 롯데그룹을 보는 소비자, 근로자, 감독당국, 그리고 국내와 해외의 투자자들의 시선이 어떨지 몹시 두렵다.
프로젝트성 5개년 경제개발계획, 그리고 '특혜'가 빈번하게 거론될 정도로 강력한 정부의 뒷받침으로 큰 한국 대기업들은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빠르게 성장했다. 하지만 반대급부로 튼튼하고 건강하게 오래 살아남을 수 있는 '내구연한'(耐久年限)을 갖추지 못했다. 그 가운데 가장 아킬레스 건이 '2~3세 승계 이슈'다.
어느 대기업도 '소유와 경영의 분리'라는 명제를 고민하지 않았다. 수십년 황제경영을 하는 동안 "자녀 세대에는 어떻게 이끌게 할까'를 미리미리 준비하지 않았다.
롯데그룹만 놓고 봐도 이미 수년전부터 환상형(環狀型) 순환출자구조, 일본 비상장사에 치중된 계열사 지배구도가 위험할 수 있다는 경고가 나왔으나 아무런 대비가 없었다. 오로지 '창업자'의 입김만 중요했다. 그 창업자는 나이가 들어버렸고, 판단은 수시로 바뀌고 있다. 이에 대한 아무런 대책도 없다.
외신들이 '한국기업은 강력한 경쟁력에도 불구, 전근대적인 소유-지배구조 때문에 해외 동종기업에 비해 평가를 못받고 엘리엇 사태를 또 겪을 수 있다"고 비판해도 사실 뭐라 할 말도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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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베스트조선 유료서비스 2015년 08월 03일 14:03 게재]
입력 2015.08.06 07:00|수정 2016.03.06 18: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