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쟁국 중국·일본, 장기 로드맵 구축
한국 정부, 전문가 부재에 책임 회피
삼성重, 그룹내 지원 여부 최대 변수
대우조선, 부실 원인 두고 '네 탓 공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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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1위'라는 허울뿐인 타이틀을 버리고 현실을 직시하는 데 정확히 10년이 걸렸다. 국내 조선 빅3는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반짝 호황기 시절에 사운을 걸 정도로 수주 경쟁에 몰두했다. 결과는 참담했다. 몇 년째 적자가 이어지는 것은 부차적인 문제다. 한국 조선산업의 존속 자체가 우려되는 상황에 처했다.
조선사에 돈을 대 준 금융기관, 그리고 국가 산업을 관장하는 정부 모두 조선사들의 저가 수주경쟁을 수수방관했다. 그러는 사이 경쟁국들은 산업 경쟁력 강화를 차근차근 준비했다. 정부와 금융기관과 기업이 머리를 맞대고 장기 로드맵을 만들었다.
한국은 이제서야 조선업 구조조정 기치를 내걸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청사진조차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전문가 집단이 부재한 정부는 조선산업 구조재편에 대한 밑그림도 내놓지 못했다. 부처와 업계간 이해 관계를 조율하기는커녕 시작부터 손발이 맞지 않고 있다. 이제는 대우조선 부실에 대한 책임 회피와 '네 탓 공방'만 가열되고 있다. 그러는 사이 조선사들은 실효성 부족한 자구안을 내놓고 '각자도생' 모드에 돌입했다.
결국 이번에도 조선업 경쟁력 강화라는 근원적인 문제 해결에는 접근하지 못한 채 땜질식 처방으로 끝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실효성 떨어지는 빅3 자구안…'각자도생' 시간 끌기 돌입
현대중공업, 삼성중공업, 대우조선해양은 자구계획안을 지난 8일 동시에 발표했다. 각각 3조5000억원, 1조5000억원, 5조3000억원 등 10조원이 넘는 규모다. 하나하나 들여다보면 대부분 실효성이 떨어진다.
현대중공업은 자구안 중 70%가량을 올해 집중적으로 시행하겠다고 발표했다. 비핵심자산을 정리하는 방안이 1조원 규모로 가장 비중이 크다. 하지만 하이투자증권 등 금융계열사나 매각대상으로 제시한 부동산을 제값 받고 팔 수 있을 지가 문제다. 하이투자증권만해도 이렇다할 메리트나 인수후보가 부족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그나마 가장 확실한 카드로 거론된 현대오일뱅크 지분 활용 방안은 이번에 구체적으로 명시하지 않았다.
삼성중공업의 자구계획 규모는 3사 중 가장 작은데다 매각 가능한 자산도 그리 많지 않다. 유상증자를 언급하긴 했으나 삼성그룹의 지원 가능성은 적시되지 않았고, 시장 상황을 종합해 고려하겠다는 원론적인 입장만 반복했다.
대우조선해양은 부실 규모만큼이나 가장 큰 규모의 자구계획안을 발표했다. 하지만 실효성은 가장 떨어진다는 평가다. 세계적인 설비 과잉 상황에서 플로팅 도크와 같은 자산이 잘 팔릴 것이라고 기대하기 어렵다. 임직원 임금 반납 등의 비용절감안도 5년간 순차적으로 진행되는 장기 플랜이다.
조선사들이 내놓은 자구안은 무엇을 목표로 삼고 있는지가 불분명하다. 즉 지금의 수주절벽에 따른 유동성 위기를 극복하겠다는 것인지, 아니면 향후 업황이 지속적으로 좋지 않을 것에 대비해 규모를 줄이는 ‘다운사이징’을 하겠다는 것인지부터 애매하다. 이는 정부가 아직까지 구조조정의 큰 그림을 그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이번 자구안은 유동성 확보의 키를 쥐고 있는 채권단에 보여주기 위한 용도로 마련된 것 뿐이라는 평가다. 결국 '시간벌기'용도 밖에 되지 않겠느냐는 지적도 나온다.
◇주변국들은 선제적인 구조조정 진행中…한국정부만 요지부동
반면 이웃 일본은 조선대국의 옛 명성을 찾기 위해, 또 중국은 글로벌 1위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일찌감치 조선업 구조조정에 뛰어들었다.
20세기 중후반 글로벌 조선 1위였던 일본은 불황기였던 1980년대를 전후로 대규모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장기 불황의 터널을 지나면서 여러 시행착오를 겪었지만 구조조정의 효과가 서서히 하나 둘씩 나타나고 있다.
일본 정부와 조선업계는 중장기적 관점에서 접근, ▲일부 조선사 통폐합 ▲조선사간의 전략적 제휴 ▲고부가가치 선박 주력 ▲설계 분야 확대 ▲연비 성능 및 에코십 경쟁력 향상을 목표로 제시했다. 그 결과는 조선업 부흥으로 돌아왔다.
중국은 정부 주도 하에 더욱 강력한 구조조정을 진행 중이다. 2013년부터 국영 조선사를 중심으로 51개 기업만을 선별해 금융지원을 하고 있다. 발주사·조선사에 대한 선박금융뿐만 아니라 전방산업인 해운업에 대한 지원도 함께 이뤄지고 있다. 대신 재무적으로 버틸 여력이 안 되는 조선사들은 문을 닫고 있다.
중국 정부는 "글로벌시장에서 경쟁력을 갖춘 대형조선소를 육성하겠다"는 뚜렷한 기본방침을 갖고 있다. 중국의 12차 5개년 계획(2011~2015년)은 수주잔고·건조량 등 양적 측면뿐 아니라 수주금액 같은 질적 측면에서도 글로벌 1위로 부상하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다. 해양플랜트 매출을 연평균 60.7% 증가시키겠다는 구체적인 목표까지 제시했다.
한국 정부만 요지부동이다. 그나마 조선해양플랜트협회가 주관하는 업계 공동 컨설팅 결과에 따라 사업재편 등 구조조정을 하겠다고 밝혔다. 컨설팅은 오는 8월에 종료된다. 결국 조선산업 구조재편은 9월 이후에야 가능하다는 얘기다. 애초에 5대 산업 구조조정 기치를 내걸었을 때와 비교하면 정부의 입장은 극히 소극적으로 바뀌었다.
◇그룹 지원의지 '오리무중'인 삼성重 최대 변수…대우조선, 사정 타깃으로 변질
조선업 비중이 절대적인 현대중공업그룹은 사실상 버티기에 돌입했다. 이번 위기만 감내하면 결국 이번 구조조정의 최종 수혜자가 될 가능성이 크다는 전망도 나온다. 결국 직접적인 구조조정 대상은 정부가 소유한 대우조선해양과 그룹 내 존재감이 미약한 삼성중공업이다.
시장의 최대 관심사는 삼성중공업에 대한 삼성그룹 또는 이재용 부회장의 지원 여부다. 삼성중공업이 자구안 제출을 한 시점부터 그룹의 선 긋기가 시작됐다고 보는 쪽이 있는가 하면, 꼬리 자르기에 대한 비판 여론을 의식해 일정 부분의 지원이 불가피할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삼성엔지니어링 지원 사례가 거론되기도 한다. 하지만 산업 구조적 측면에서 엔지니어링과 조선업은 동일한 평가를 하기 어렵다는 의견도 설득력 있다. 말 그대로 삼성중공업의 미래는 오리무중이다.
시장에선 삼성중공업과 대우조선을 놓고 상선과 상선, 특수선과 특수선, 방산과 방산 등 선종별 짝짓기 시나리오도 그리고 있다. 시나리오 수행 주체로는 산업은행이 거론된다. 삼성이 조선업을 확장할 의지가 없는데다가 정부가 조선업 구조개편을 천명한 상황이니, 이런 시나리오가 현실화되려면 정부 차원의 전방위적인 지원이 필요하다.
다만 현재와 같은 정부 주도의 구조조정에 부정적인 의견도 만만치 않다. 가장 큰 이유는 정부가 내놓은 구상에 내용이 없다는 점이다. 경쟁국들과의 격차현황이나 선종별 수요 전망, 국내 기업의 경쟁력 강화 역량 수준 등 산업ㆍ기업 분석은 담겨있지 않고, 결국 조선사 3곳을 2곳으로 줄이는 수급 조절의 단순한 조치만 들어있다는 이유다.
구조조정 경험이 있는 한 그룹의 관계자는 "정부가 얘기하는 산업 구조조정은 이미 답을 정해놓고 밀어붙이는 1990년대 외환위기 시절의 그것과 달라진 게 하나도 없다"며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20년 동안 정부에서 산업 이해도가 높은 전문가들을 육성하지 못했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구조조정 시기가 늦어진 만큼 땜질식 처방이 아닌, 제대로 된 산업재편 계획을 만들어야 한다고 조언한다. 최소한 덩치만 더 커진 제2의 대우조선, STX조선해양의 출현은 막자는 것이다. 정부의 일방통행식이 아닌, 금융기관과 해당 기업, 전문가들의 의견을 수용할 수 있는 창구가 마련돼야 한다는 지적도 많다.
하지만 최근의 상황을 보면 조선업 구조조정은 시작도 하기전에 꼬이고 있는 모습이다. 대우조선 부실 원인을 놓고 주채권은행이자 대주주인 산업은행과 청와대·기획재정부·금융위원회 간의 책임 공방이 한창이다. 대우조선의 처지는 '구조조정 대상'에서 '검찰의 사정 타깃'으로 바뀌었다. 게다가 9월 국회의 국정감사를 지나 연말이 되면 본격적인 대선 국면에 접어들어 구조조정 추진 동력을 잃을 수 있다. 사실상 조선업 재편은 물 건너 갔다는 자조적인 얘기가 벌써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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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베스트조선 유료서비스 2016년 06월 15일 07:00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