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의 정치 시스템이 마비 상태다. 대통령의 탄핵소추안이 가결된 상황에서 정치의 '정상화'와 이를 통한 실효성 있는 경제정책이 나오기를 기대하기 어렵다. 최악으로 치닫는 해운업 구조조정에서 드러났듯 정부의 산업재편과 관할 능력은 오히려 기업들에게 도움은커녕 '방해'가 되는 수준이다.
이런 와중에 세계 각국에서 몰아치는 보호무역주의 파도가 메가톤급 변수로 떠올랐다. '수출'로 먹고 살아온 한국경제의 기반을 뒤흔들 가능성이 거론된다. 연구기관들은 하나같이 내년도 국내 주력산업의 내수와 수출분야 모두 우울한 전망을 쏟아내고 있다.
기대할 것이 없다 보니 역량 있는 기업들은 미국, 중국과 일본 그리고 유럽 등 외생변수에 취약한 한국시장을 떠나 해외시장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 재무기반이 비교적 탄탄한 기업들의 '코리아 엑소더스(Korea exodus)'는 가속화 할 것이란 전망이 지배적이다. 반대로 '대한민국'이라는 든든한 울타리를 잃어버린 한계기업들은 이제 '사활'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됐다.
◇ 美·中·日 외생변수에 취약한 한국시장…"기댈 곳 없다"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사드) 체계 도입 결정 후 중국의 ‘한한령(限韓令)’을 통한 보복조치가 한국의 미래산업에 타격을 입히고 있다. 엔터·유통·여행 등 대표적인 대(對)중국 산업이 영향을 받았다. 미디어와 엔터관련 주가는 연일 하락세를 나타냈고 이를 주도했던 기업들의 주가는 연중 최저가를 기록했다. 중국시장 진출을 염두에 두고 기업공개(IPO)를 추진하던 기업들 또한 계획 수정이 불가피한 상황이 됐다.
중국자본의 국내시장 투자가 불투명해지면서 중국 해바라기였던 금호타이어·ING생명 등 초대형 M&A 또한 활기를 잃어가는 모양새다.
PEF업계 한 관계자는 "중국의 한한령이 시장에 알려진 이후 미디어·엔터·유통을 비롯한 중국매출이 높은 산업분야에서부터 직접적인 피해를 입기 시작했다"며 "중국 투자자를 진성 후보로 고려했던 대형 M&A 또한 계획에 차질이 생길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여기에 미국 차기 대통령 트럼프의 자국 우선주의와 중국의 보호무역주의가 부딪치면서 넛 크래커(nut-cracker)의 위기를 다시 맞이했다. 동시에 전 세계적으로 확대중인 자국산업 보호주의는 국내 산업전반을 이끌었던 자동차·조선·철강·석유화학·정유·정보통신(IT) 등 거의 모든 주력산업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반면 경쟁력 있는 산업을 관할할 국내 컨트롤타워는 역할을 상실한지 오래다. 신사업 발굴과 육성을 차치하고도 취약업종 구조조정부터도 정부의 기능은 작동하지 않고 있다. 한진해운-현대상선 구조조정 과정에서 드러난 정부의 무능은 향후 해운·조선·건설 등 구조조정에서도 '답습'될 가능성이 크다. 조선업은 이미 건조물량 취소와 인도연기·신규수주 절벽에 직면해 있고 올해 반짝 호황을 맞이했던 건설업종 또한 이미 경기위축이 가시화하고 있다.
기업들로서는 국내에서 더 기대할 것이 없어진 상황. 결국 신 사업 추진, 생산기지 구축과 투자 등을 해외에서 늘리는 추세다.
삼성전자는 이미 수년 전부터 생산기지를 중국과 베트남 등지로 이전, 대부분의 생산설비를 갖췄다. 또 삼성글로벌이노베이션센터(GIC), 삼성전락혁신센터(SSIC) 등 미국에 본진을 둔 투자조직을 통해 미래먹거리를 발굴하고 있다. 지난 2013년 이후 진행한 20여건의 M&A는 모두 해외기업이었다. 현대차도 마찬가지로 올해 미국·중국·인도·러시아·체코 등 해외생산기지의 생산량은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CJ그룹을 위시한 일부 기업은 베트남·터키·말레이시아 등 동남아 시장 공략에 적극 나서고 있다.
미래 먹거리, 즉 신 사업분야에서도 기엄들은 국내보단 해외거점을 확보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전기차 배터리분야에서 LG화학은 지난 10월 4000억원을 들여 폴란드 공장착공에 나섰고, 삼성SDI 또한 8월 헝가리에 위치한 기존 PDP공장을 재건축하는 배터리 공장 착공에 돌입했다. 이들 모두 국내시장 보다는 해외에 생산거점을 확보함으로써 원가절감과 현지수요에 즉각 대응하겠다는 전략이다.
반면 한국을 떠난 기업들이 다시 돌아오는 사례는 줄어들고 있다. 올해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지난 2013년 해외생산기지를 국내로 다시 옮긴 기업 수는 총 37곳이었으나, 2014년 16곳, 2015년 9곳으로 감소 추세다. 올해엔 약 5개 기업이 한국으로 돌아왔다. 미국이 대기업 해외공장을 본토로 옮겨오는 '리쇼어링(Reshoring)' 전략을 추진하는 것과 반대인 셈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국내 대기업만을 믿고 있던 중소 제조업체들에 미치는 여파도 상당하다.
재계 한 관계자는 "국내에서 새로운 성장동력을 찾지 못한 대기업들이 생산거점을 비롯한 해외진출은 앞으로도 더 가속화 될 것으로 보인다"며 "비싼 인건비와 정치를 비롯한 대내외 변수가 상존해 있는 한국에 남아있을 이유가 없는 만큼 기업하기 편한 국가들로 전략적인 진출이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결국 한국에는 '본사'만 남아있을 뿐, 고용 창출 효과도 급감하고 충분한 구매력을 갖춘 시장조성의 역할도 줄어들 것이란 우려가 상존하고 있다.
◇ 활기 잃은 금융시장…설 자리 잃은 자본시장 참가자들
기업들의 국내 활동력이 줄어들면서 금융시장의 생동감도 함께 떨어지고 있다. 그간 기업금융과 자문으로 먹거리를 마련해 온 자본시장 참가자들 또한 운신의 폭이 크게 좁아지고 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대기업들이 지배구조 개편과 승계·신사업 확대를 동시다발적으로 진행하면서 먹거리가 늘어날 것으로 생각한 이들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대기업들이 정작 찾는 곳은 해외 시장뿐이다. M&A업계 관계자는 "삼성전자의 하만 인수뿐만 아니더라도, 대기업들이 국내에서 새로 인수할 매물이나 자산이 몇 개나 있겠느냐"며 "인수 거래는 유럽이나 미국, 혹은 동남아든 무조건 크로스보더 거래에 그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런 거래에서 국내 금융시장과 자문사들이 끼어들 자리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점이다.
사상 최대 M&A라는 하만 인수에 참여한 국내 기관은 삼성측 실사(Due Diligence)에 참여한 딜로이트안진 정도에 그친다. 그것도 딜로이트 현지와 공동작업이다. 나머지 자문도 모두 해외 기관에 맡겼다. 최대규모 거래임에도 불구하고 화려한 금융기법 없이 전액 현금거래로 진행된 탓에 은행·증권사·PEF 등 시장의 자금 줄 역할을 하던 기존 업체들 또한 관여할 틈이 없었다.
국내 대형 로펌 M&A 담당자는 "기업들이 점점 해외로 눈을 돌리고 있고, M&A에 특화 한 중소형 자문사가 대형거래에도 참여하고 성사시키는 것을 비춰볼 때 M&A 시장에서 대형 자문사들의 설 자리가 점점 좁아질 것이란 위기감이 적지 않다"고 말했다.
비단 M&A 뿐만 아니다. 기업들의 자금조달 움직임도 예년만 못하다. 초 저금리 시장에서 꾸준히 자금조달에 나섰던 기업들은 올해부터 순상환 기조로 돌아섰다. 높은 금리 속에서 은행권 대출이 어렵고 회사채 시장을 찾지 못하는 기업들은 점점 메자닌(Mezzanine) 시장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 이마저도 신생 운용사 위주로 짜인 시스템 속에 국내 증권사들의 설 자리는 점점 더 좁아지고 있다.
기존의 영업방식을 고집하던 자본시장 참여자들 사이에선 '변화'하지 않으면 머지않아 '도태' 될 수 있다는 위기의식이 부각되고 있다. 각자도생의 기로에선 기업과 이를 바라보는 시장 참여자들 모두, 내년을 기약할 수 없는 '생존게임'이 이미 시작됐다.
-
[인베스트조선 유료서비스 2016년 12월 14일 09:00 게재]
입력 2016.12.15 07:00|수정 2016.12.16 10:58
변화냐, 도태냐...자본시장 '선택의 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