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처투자 예산=눈먼 돈'…새 정부서도 주먹구구식 자금 배분?
입력 2017.04.13 07:00|수정 2017.04.14 10:09
    정부, 투자처 없어도 출자사업 감행…'벤처사업 성과 쌓기용'
    VC, 정부 돈 받아야…10억씩 투자해 손쉽게 수익률 방어
    "없어져야 할 한계 벤처기업엔 돈 들어가…'빅 위너' 못 만든다"
    • 정부가 매년 막대한 예산을 투입하며 키워온 국내 벤처투자 시장이 임계점에 도달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벤처펀드에 투입되는 자금은 늘고 있지만 이 투자금을 유치해 성장하는 벤처기업은 더 이상 찾아보기 힘들다는 분석이다.

      정부는 "펀드사업을 추진했다"라는 단기 성과에 집착, 매년 투자처도 따지지 않고 거의 기계적으로 예산을 편성하고 있다. 덕분에 벤처투자 시장 참여자들은 손에 떨어지는 정부자금에만 쉽게 의존하기 시작했다. 이런 시스템에서는 '제2의 김기사'를 등장시키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정부, 펀드 개수=성과?…'묻지마식 예산 편성' 

      모태펀드를 운용하는 한국벤처투자는 최근 2017년 1차 정시 출자사업 운용사 접수를 마무리했다. 마감 결과 문화체육관광부가 출자하는 문화계정·관광계정 내 'NEW콘텐츠'와 '관광산업육성' 등 일부 분야는 지원한 운용사가 단 1곳이거나 아예 없었다. NEW콘텐츠 펀드는 가상현실(VR)·증강현실(AR) 기술을 융합한 콘텐츠 기업에, 관광산업육성 펀드는 관광사업을 하는 벤처기업에 투자해야 하는 펀드다.

      벤처캐피탈(VC) 업계 관계자는 "NEW콘텐츠 펀드의 경우 운용사들이 투자할 기업이 마땅치 않다는 의견을 전달했음에도 해당 분야가 그대로 편성됐다"며 "각 정부 부처에서 한두 개씩 계정을 나눠 펀드 사업을 진행하고, 부처 사업 특성상 펀드 결성 숫자 자체를 중요하게 생각하다보니 분야별 조정이 어려운 것 같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부는 2005년 모태펀드 설립 이후 매년 공격적인 신규펀드 결성에만 앞장서고 있다. 정부기관·산업은행·지자체·성장사다리펀드 등을 포함한 정책성 출자금은 2012년 3246억원에서 지난해 1조1810억원까지 늘었다.

      올해는 기존에 출자를 하지 않았던 교육부와 환경부도 출자금을 내놓았다. 농림축산식품부는 2014년 독자적인 운용기관인 농업정책보험금융원을 만들어 농식품 모태펀드를 운용하고 있다. 국방부는 벤처펀드 출자 예산을 확보하지 못해 모태펀드 출자를 미룬 상황이다.

    • 중소기업청에 따르면 지난해 약 3조원 규모 신규 벤처펀드가 결성됐다. 전년도에 비해 17.9% 증가한 수치다. 같은 기간 신규 투자는 약 2조원으로 3.1% 증가하는 데 그쳤다.

      결과적으로 정부가 '중소·벤처 생태계 활성화'를 주창하면서 새로운 펀드를 늘리는 데만 급급하다는 해석이 나온다. 그만큼 펀드를 많이 결성했다는 것이 정부 부처의 벤처사업 성과로 기록된다는 생각 때문이다.

      심지어 펀드 존속 기간을 고려하더라도 새롭게 결성되는 벤처펀드 자금이 늘어나는 정도가 실제 투자집행 증가세보다 큰 상황이다.

      다른 VC업계 관계자는 "각 정부부처가 편성돼 있는 자금을 소요해야 한다는 부담 때문에 굳이 투자 분야를 세분화해 펀드를 작은 사이즈(200억원~300억원)로 만들면서 '펀드 개수 늘리기'에만 신경 쓰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 관계자는 "정부자금 의존도가 50%에 육박하는 국내 VC는 공적자금을 따 내는 걸 외면할 수 없어 'PT에서 좋은 점수를 받자'는 마음에 10억원 등 작은 규모 투자를 집행해 빠르게 펀드 자금을 소진하려 한다"고 밝혔다.

      ◆돈 부터 받고 보자는 벤처캐피탈…"단기 수익에만 연연" 

      정부가 '펀드 공장' 수준으로 자금을 기계적으로 뿌려대면서 국내 VC 투자는 점점 단기 운용에 그치기 시작했다.

      벤처업계 관계자는 "현재 VC들이 가장 많이 투자하는 구간은 10억원 이상 30억 미만이며, 그 다음은 10억원 미만이라 100억원~200억원 규모 투자는 10건도 채 안 된다"며 "적은 규모 투자금을 빠르게 회수할 수 있는 곳에만 투자하다보니 초기단계부터 후기단계까지 벤처기업 성장단계 별로 적절히 투자금을 늘리며 벤처기업을 육성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 하다"고 말했다.

      다른 벤처업계 관계자는 "빨리 자금을 소진하기 위해 이미 성장이 진행된 프리IPO 단계 기업에 투자하는 등 수익률 맞추기에만 연연하고 있다"며 "이러다보면 정부가 바라는대로 초기 단계에 자금이 필요한 성장성 있는 기업을 찾는 일에는 소홀해진다"고 토로했다. 미국 실리콘밸리가 키운 '우버'나 '넷플릭스' 같이 주요 산업의 변화를 주도하는 벤처기업에 집중하지 않는다는 설명이다.

      정작 장래성이 높고 한국 산업 지형도를 바꿀만한 초기 단계의 기업들은 국내 자금이 아닌 해외 자금 유치, 그리고  해외 대기업과 협력을 기대하는 역선택이 발생하고 있다.

      실제 지난해 가장 많은 투자금을 유치한 벤처기업은 대부분 해외 투자자의 투자를 받았다. 정보기술을 융합해 화장품 유통 사업을 하는 뷰티 스타트업 미미박스(1430억원)는 알토스벤처스와 굿워터캐피탈 등 8개 미국 벤처캐피탈 업체로부터 투자 받았다. 배달의 민족을 운영하는 우아한형제들(570억원)은 중국계 벤처캐피탈 업체인 힐하우스캐피탈그룹의 투자를 유치했다.

      반면 정부 예산이 투자된 벤처들은 한정적인 분야에만 몰려들면서 자금을 낭비하고 있다. 사업 진입 장벽이 높지 않은 O2O(온·오프라인 연계) 서비스 벤처기업이 대표적으로 꼽힌다. 한때 구글 플레이 스토어에서 검색되는 세탁 서비스 관련 O2O업체는 30여개에 달했을 정도다.

      결국 정부가 명분 쌓기용으로 쏟아부은 벤처자금과 손쉽게 투자실적(Track Record)을 쌓으려는 VC업체들이 국내 벤처시장을 '고인 물'로 만들었다는 분석이다.

      다른 벤처업계 관계자는 "일단 펀드 결성부터 하자는 일부 VC들과 회수나 투자는 고려하지 않고 펀드만 결성하고 보는 정부 태도가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지금의 벤처투자 시장을 만든 것"이라며 "펀드 결성을 위해 반드시 모태펀드를 출자자(LP)로 받아야 하는 규제를 풀어 민간에 맡기는 방법을 고민해야 할 때"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