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들 다급할 때 찾는 건
막강 네트워크 갖춘 글로벌 펀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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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재계와 경제전반은 어쨌든 대기업 중심으로 편제돼 있다. 경제력 집중 문제의 옳고 그름을 차치하고 자본시장 관점에서만 보면 이들과 손을 잡아야 트랙레코드가 쌓이고 큰 돈을 버는 구조다.
골드만삭스를 위시한 투자은행(IB)들이 삼성ㆍ현대차ㆍSK 거래에 초청을 받지 못하면 글로벌 본사로부터 엄청난 질책과 인사조치까지 당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고수익을 추구하는 사모펀드(PEF)도 별반 다를 것 없다.
그러나 한국을 대표하는 대기업들이 다급할 때 정작 이들의 '간택'을 받을만한 펀드가 그리 많지 않다. 오히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지금 국내 PEF들은 상당히 곤혹스러운 상황에 처해 있다.
◆베인ㆍKKR의 '인베이젼'.....어피니티ㆍMBK의 '승계ㆍ중견'투자
베인캐피탈은 휴젤ㆍ도시바 메모리, 그리고 카버코리아 매각까지 올 한해 한국에서 멋진 한 해를 보냈다.
KKR은 당사자들도 놀랬을 정도로 큰 규모인 10조원짜리 아시아 투자 펀드를 만들어 놨다. 한국 사무소 오픈이 예정된 TPG는 내년 주주총회를 서울에서 열 정도로 한국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유럽 최대 사모펀드 CVC는 유독 한국에서 죽을 쒔지만 곧 사활을 건 투자를 시도할 것으로 보인다.
결국 한국의 대형 바이아웃 시장이 글로벌 펀드들에 점령당하는 모양새다. 심지어 당장 돈이 되지 않아도 미래를 좌우할 신사업ㆍ4차산업ㆍ미래산업에 가장 적극 투자하는 곳도 이들 글로벌 펀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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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이 가진 막강한 파워는 이번 카버코리아 매각에서 여실히 증명됐다. "최초 투자 당시부터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밸류에이션인데 이를 심의과정에서 통과시킨 것 자체가 대단했다" , "베인과 골드만은 전 세계에서 스토리를 가장 잘 짜내는 투자 집단 두 곳이다", "제 아무리 한국에서 잘나가는 금융회사라 해도 런던ㆍ로테르담 본사에서 유니레버 CEO급들을 만날 수나 있을까" 등으로 요약된다. 허탈감을 표현하는 업계 관계자들도 적지 않았다.
비슷한 시기. 한국에서 가장 잘 나간다는 어피니티나 MBK파트너스는 승계이슈를 가진 중견기업 거래를 잇달아 단행했다.
락앤락 창업자는 어피니티에 지분을 매각하면서 경영권 승계 대신 매각을 선택했다. MBK의 골프존 투자도 장기적으로는 김영찬 회장 일가 승계이슈와 관련될 가능성을 보는 시각이 적지 않다.
이런 움직임은 다른 블라인드 펀드에도 전이되는 분위기다. 2~3세들이 과거와는 다른 라이프 스타일 등을 이유로 아버지의 사업을 이어받지 않으려는 움직임들이 적지 않아서다. 사모펀드들이 그렇게나 자주 요구받았던 '구조조정 산파' 역할은 못하고 있지만 '가업 승계문제 해소' 만큼은 톡톡한 역할을 할 것으로 예상된다.
◆개선되지 않는 국내 투자자ㆍ감사원 눈치보기...삐딱한 규제당국
해외 자금이 한국에서 발빠른 움직임을 보이는 동안. 국내 투자부문은 거의 발전을 이뤄내지 못했다.
일단 투자자(LP)부문은 처참하다. 특히 2004년 간접투자자산운용업법 개정을 기점으로 PEF 제도가 도입된 이래. 무려 4번의 정권을 거치면서도 국민연금의 '고루함'과 '보신주의'는 개선되기는 커녕, 되레 악화됐다. 이번 국정감사에서 드러난대로 그동안 8조5388억원을 무려 70개 PEF에 배분하는 동안 쓴 성과보수(Carried Interest)가 겨우 85억원에 그친다. 투자금액의 딱 0.1%수준. 펀드를 굴리는 데 쓰라고 주는 운용보수(Management Fee)보다 더 낮다.
한마디로 "PEF로 국민연금 수익을 많이 올리겠다" 는 목적 의식은 없고, 그냥 시즌이 되면 미인대회 열어 자금 배분하는게 주된 업무라고 평가받을 수준이다. 이를 야기하는 감사원 눈치보기도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이러면서도 그간 국민연금의 투자를 오랫동안 챙겨온 핵심인사의 외부취업을 시도하자 감사를 무기로 이들의 앞길을 가로막은 일들은 지금까지도 업계에서 큰 비난을 사고 있다. "가능하다면 국민연금 돈은 안 받아야 한다"는 코멘트는 예사로 나온다.
국내 운용사(GP)의 경우. 최근 성과보수ㆍ수익 배분 문제로 내부싸움과 소송이 빈번해 지고 있다. 배분에 대한 규정과 방향성이 뚜렷하지 않고 주먹구구식이다보니 발생하는 일이다. 이 문제로 실망해 회사를 떠난 케이스도 다량 찾아볼 수 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각 운용사별 투자철학이나 방향이 뚜렷하게 잡힌 곳은 손에 꼽을 정도다.
업계에 대한 정부와 감독당국의 시선도 그리 곱지 못하다.
금융 부문 전반에 대한 관심도 저하가 이번 정부의 약점으로 거론된다. 이런 가운데 최근 한국 금융시장의 화두로 떠오른 ' 착한금융'이라는 테마가 PEF부문에도 영향을 줄 전망이다. 대기업 집단 지정제도가 혹시 PEF에도 적용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대표적인 예다. PEF 제도가 도입됐던 노무현 정부 당시에도 이와 유사한 문제들을 놓고 당시 재정경제부(현 기획재정부)와 공정거래위원회가 대판 싸움을 벌였고, 경제부총리와 여당의원들까지 가세한 이력이 있다.
◆SK는 왜 '미래에셋'이 아닌'베인'을 선택했을까
올 2월. SK하이닉스가 도시바 메모리 인수전에 한참 열을 올릴 당시. 미래에셋이 과감하게 공동투자를 제안하면서 시장에 큰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기실 이런 아이디어의 시초는 2011년 전광우 이사장 재직 당시 국민연금의 코퍼레이트 파트너십 펀드(일명 코파펀드)가 먼저였으나 둔중한 국민연금은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 대신 국내 금융업계에서 가장 혁신적으로 꼽히는 박현주 회장이 이 아이디어를 재활용해 네이버를 위시한 여러 대기업과 공동 해외진출을 노렸다.
'좁은 한국시장을 벗어난 해외 진출' 이라는 당위명제를 놓고 그나마 산업과 해외를 가장 잘아는 대기업을 활용하자는 컨셉. 한켠으로는 SK라는 브랜드와 미래에셋이라는 브랜드 정도면 해외에서도 먹히겠다는 반응도 나왔다.
하지만 정작 SK가 손잡은 곳은 미래에셋이 아닌, 베인캐피탈이었다. 정확히 따지면 베인캐피탈이 주도하고 SK하이닉스가 응하는 수준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제 아무리 한국을 대표하는 미래에셋이라해도 베인 수준의 장대한 컨설팅 파워ㆍ정계와 재계를 아우르는 막강한 글로벌 네트워크 앞에서는 견줄 상대가 못되기 때문.
지금은 SK하이닉스 사례에 그친다. 그러나 이제 현대차, 그리고 삼성까지 승계와 지배구조 이슈라는 메가톤급 투자이슈들이 불거질 시기가 그리 멀지 않았다. 이 투자는 PEF에게는 수십년에 한 번 올까말까하는 거대한 투자 호재가 될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지금 시장 움직임을 봐서는 이 과정에서 국내 PEF들이 설 자리가 잘 보이지 않는다. 미리미리 이런 이슈를 대비해 온 똘똘한 PEF가 아닌 다음에야 또다시 KKR이니 베인이니 골드만삭스니 하는 이름만 등장할 가능성이 적지 않다. 심지어 삼성은 지난 수십년간 PEF를 상대하지 않았고 현대차는 이노션 지분매각 거래에서 KKR이나 골드만삭스에 대해 상당한 반감을 보였다는 평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는 구조조정 과정에서 벌어지는 과실을 해외 자본에 넘겨주느냐"는 답답함이 13년전에 PEF를 제도권으로 끌여들였지만 지금도 상황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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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베스트조선 유료서비스 2017년 10월 24일 07:00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