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하게 많이 풀었다"…투자·회수는 별개 문제
우량 투자처 많지 않은데 밸류만 높아져
5년 뒤 발 묶이는 투자금 늘어날 가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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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올해도 대규모 벤처 투자 자금을 푼다. 10조원 규모 투자 재원을 마련해 벤처 활성화의 마중물 역할을 하겠다는 계획도 내놨다. 초기 스타트업 투자를 유도해 벤처·스타트업 풀을 늘리면 궁극적으로 '제2의 카카오'가 등장할 확률도 끌어올릴 수 있다는 생각이다.
벤처 투자업계는 정책의 당위성에 대해선 공감하는 분위기다. 선진국에 비해 민간 투자자의 참여가 미미한 한국 벤처 투자 시장의 상황을 감안하면 다른 도리가 없다는 설명이다. 이와 별개로 한 번에 많은 돈을 급하게 푼 것 아니냐는 경계의 목소리가 나온다. 부작용도 만만치 않을 것이란 쓴소리다.
정부는 최근 혁신모험펀드 조성·운영 계획을 발표했다. 오는 2020년까지 창업 3년 이내의 초기 기업에 투자하는 혁신모험펀드(2조원)와 성장 벤처기업의 인수·합병(M&A) 등에 투자하는 성장지원펀드(8조원)를 조성한다. 당장 올해 모태펀드·성장사다리펀드 등을 통해 1조1000억원을 출자, 총 2조6000억원 규모의 자(子)펀드를 만든다.
회수 창구 넓히기 작업에도 나섰다. 테슬라 상장 시 상장 주관사의 풋백옵션 부담을 면제하는 내용 등을 담은 코스닥 시장 활성화 방안을 확정했다. 벤처·스타트업의 상장 활성화로 투자자는 투자금을 회수하고, 회수한 자금을 또 다른 초기 기업에 투자하는 선순환의 벤처 생태계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모태펀드를 운용하는 한국벤처투자 관계자는 "정부가 벤처 투자 활성화에 사활을 걸고, 민간의 벤처 투자 참여를 독려하고 있다"며 "연기금·공제회 외 민간 금융사들도 예년 대비 투자를 늘릴 것으로 보여 작년 수준(3조원)을 상회하는 신규 재원 마련도 가능할 것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벤처 투자 재원은 사상 최대 수준에 육박할 것으로 보인다. 작년 11월까지 소진되지 못한 투자 대기자금은 7조5334억원으로 처음으로 7조원을 돌파했다. 2017년 새롭게 결성된 펀드(3조7750억원)까지 단순 계산하면 10조원이 훌쩍 넘는 규모다. 당장 올해 만기가 돌아오는 펀드 물량만 1조744억원에 이른다. 현재 운용 중인 벤처펀드(모태펀드·성장사다리펀드가 출자한 펀드)는 18조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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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계는 뒤숭숭한 모습이다. 투자와 회수는 뒷전에 둔 '돈 풀기' 작전으로 벤처 시장이 외형만 커진 속 빈 강정이 될 수 있다는 우려다. 10조원에 이르는 자금을 투자할 만큼 벤처·스타트업 수가 충분지 않은데다 회수 창구 역시 장외매각·상환권 행사나 기업공개(IPO)로 국한돼 있어 투자가 쉽지 않다는 지적이다.
지표만 놓고 보면 벤처·스타트업계 저변은 확대된 듯 보인다. 2010년 2만개였던 벤처기업 수는 2016년 말 3만4814개로 덩치가 커졌다. 하지만 벤처 투자자들 사이에선 마땅한 투자처가 없다는 볼멘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우량 벤처·스타트업이 많지 않아서다. 2016년 기준 벤처기업의 매출 증가율은 9.7%를 기록해 처음으로 일반 중소기업보다 뒤처졌다. 영업이익률 역시 4.4%로 2년째 하락세를 보였다.
벤처 투자 업계 관계자는 "시총이 1조원 수준인 유니콘은 티몬이랑 옐로모바일 정도인데 이마저도 불안정한 상황"이라며 "올해 무조건 투자돼야 하는 만기 펀드 재원과 새로 조성된 펀드 재원을 5조원 수준으로 잡고, 1개 기업에 10억원씩 투자한다고 단순 계산하면 5000개의 양질의 스타트업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라고 언급했다.
실제 신규 투자 증가세는 재원 증가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2016년 기준 신규 펀드는 전년 대비 27% 늘어날 동안 신규 투자는 고작 3% 늘었다. 벤처 투자라는 꼬리표를 단, 적지 않은 자금이 기업에 투자되지 못한 채 잠자고 있는 셈이다.
투자 조건이 까다로워진 점 역시 부담 요소다. 적정 가치보다 비싼 값에 투자할 경우 후속 투자 유치가 어려워져 고사할 확률이 높아진다는 지적이다. 기업가치를 하향 조정하는 방법이 있지만 이미 한번 꺾인 기업에 투자할 투자자를 찾기가 쉽지 않고, 기존 투자자가 손실을 감내하면서 가격을 깎을 유인이 없다.
이 때문에 벤처캐피탈(VC) 업체들 중에는 올해 새로운 투자처를 찾기보다는 보유한 포트폴리오 가운데 괜찮은 실적이 나오는 곳에 추가 후속 투자를 진행하기로 내부 가이드라인을 정한 곳이 적지 않다. 일부 대형사들은 세컨더리 펀드에 힘을 싣기로 했다. 회수가 어려워진 구주가 많아지면서 이를 저렴한 가격에 살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감이 반영됐다.
한 VC업체 운용역은 "정말 괜찮은 곳 아닌 이상 새로운 곳에 투자해 물리느니 가지고 있는 것을 강화하기로 했다"며 "정부의 벤처 드라이브로 벤처 투자를 잘 모르는 일반 금융사들까지 시장에 진입하면서 불필요하게 기업들의 콧대만 높아졌다"고 토로했다.
회수 측면에선 오히려 고민이 깊어졌다는 분석도 나온다. 정부의 코스닥 시장 활성화 추진으로 기술특례상장 등 벤처·스타트업 상장이 늘겠지만 오히려 이것이 독이 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벤처 투자자들은 IPO를 통해 투자금을 회수하겠지만 성장 기간을 충분히 거치지 않은 스타트업이 억지스러운 상장 이후 오히려 주가 하락이나 사업 확장에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는 풀이다.
사실상 상환권 행사를 통한 회수 의존도가 커질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IPO까지 평균 10년이 걸리는데 펀드 만기 기간 등을 감안하면 이를 기다릴 투자자는 많지 않아서다. 상환전환우선주(RCPS)로 투자할 경우 상장에 실패하거나 주가가 하락해도 일정 정도의 투자금 회수가 가능하다.
다른 VC업체 운용역은 "지분 100%를 다 사가는 미국 실리콘밸리의 M&A와 달리 국내는 50%+1주 방식으로 스타트업을 인수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그마저도 많지 않다"며 "정부는 창업가와 기업의 부담을 줄여주기 위해 보통주 투자를 유도하고 있지만 기부가 아닌 투자인 만큼 투자자들도 퇴로를 마련해야 하지 않겠나"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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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베스트조선 유료서비스 2018년 01월 22일 07:00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