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제가 가로막는다는 지적도
대기업 입맛대로 비율 조정
소액주주 피해받는 사례도
최근 거래상의 위법 여부보다
시장 가격에 영향 줬는지 주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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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 합병 거래에서의 적정한 합병비율 산정은 오래된 명제다. 고민의 결과로 법은 최소한의 합병비율 규정을 두고 있는데 당사자간 합의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를 과도하게 규제한다는 지적이 있어 왔다.
반면 위법만 없으면 법이 다루지 않는 영역에서의 의심쩍은 정황은 문제 삼기 어렵다. 법 규정이 대주주들의 이익을 위한 합병을 공인하는 부작용을 불러온다는 의견도 있다.
자본시장법에 따르면 상장사끼리 합병할 때는 최근 1개월간 평균종가, 최근 1주일간 평균종가, 최근일의 종가를 산술평균해 가액을 정한다. 상장사와 비상장사 간 합병 시엔 비상장사는 자산가치와 수익가치를 가중산술평균한 가액으로 합병한다. 유사 업종 기업과의 비교 가치도 공시해야 한다.
법으로 합병비율을 규정하는 데 대해 기업의 결정권을 제약한다는 의견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합병의 필요성이나 기업의 실질 가치보다는 합병이 가능할 것인지를 먼저 따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법에 따라 도출한 합병비율이 당사자들이 생각하는 가치와 차이가 없을 때만 합병이 가능한 구조다.
상장사는 한 달 안의 주가만 반영하기 때문에 일회적인 사건에 의해서도 합병가액이 크게 출렁일 수 있다. 그나마 증시 휴장일을 제외하면 실제 거래일은 20일 남짓에 불과하다. 이사회 전날의 변수에 특히 취약할 수밖에 없다.
M&A 업계 관계자는 “미국은 법이 합병비율을 규정하지 않고 회계법인으로부터 공정의견(fairness opinion)을 받아 경영 판단을 보완하고 있다”며 “회사의 합병은 당사자들이 생각하는 가치에 따라 협의해서 진행하면 되는데 법에서 규제한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고 말했다.
한화그룹은 최근 일감몰아주기 해소를 위해 한화S&C와 한화시스템을 합병하기로 했다. 한화시스템이 외부 매출 비중이 크고 한화S&C와 덩치 차이가 크지 않기도 했지만 비상장사라는 점도 고려했다. 자본시장법은 비상장사간 합병비율은 규정하고 있지 않다. 한화그룹은 상속세 및 증여세법에 따라 외부평가기관을 통해 합병비율을 산출했다고 밝혔다.
합병비율 규정은 자본시장법의 전신인 증권거래법부터 이어져 왔을 만큼 역사가 깊다. 예나 지금이나 기업가치 상승보다는 대기업 오너 일가의 지배구조 구축을 위한 합병 사례가 많다. 오너 일가가 입맛에 맞게 합병비율을 정하면서 소액주주들에 피해를 입혔던 원죄 때문에 법이 최소한의 관여를 하게 됐다는 평가다.
정작 불편함은 그룹 계열사가 아닌 곳들이 겪기도 한다. 다음커뮤니케이션과 카카오는 협업 방안을 논의하다 2014년 합병에 이르게 됐다. 당시 두 회사 경영진은 합의에 따라 적정 합병비율을 도출했었지만 법에 따라 산정한 가치와 괴리가 커 합병에 애를 먹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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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이 기업의 의사 결정에 일부 영향을 미치는 것은 맞지만 족쇄로 보기는 어렵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최근 잡음이 일었던 합병 거래들은 법 위반 여부가 아니라 시장 가격에 부당한 영향을 미쳤느냐가 문제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다. 승계와 관련성이 높은 합병에선 어김없이 오너에 유리한 것으로 보이는 합병비율이 정해졌기 때문이다.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에선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최대 수혜를 봤다. 삼성물산은 시가총액이 역사적 저점에 가까운 시기, 이 부회장이 최대주주인 제일모직은 주가가 급등하던 시기에 합병이 결정됐다. 삼성물산은 상장한 지 오래지만 제일모직은 몇 개월에 불과해 주가 안정성을 담보하기 어렵다는 비판이 있었다. 일부러 삼성물산 주가를 누르고 있는 것 아니냐는 의혹도 피하기 어려웠다.
현대자동차그룹은 최근 현대모비스의 모듈 및 AS사업부를 분할해 현대글로비스와 합병시키려 했다. 합병비율이 정의선 현대자동차 부회장이 최대주주인 현대글로비스에 유리하다는 문제 제기가 있었다. 외국 주주들의 반발에 맞닥뜨렸고 개편안은 철회됐다.
상장사도 분할합병 대상이 되는 부분은 비상장사처럼 평가한다. 삼성그룹은 더 확실한 평가 기준인 주가를 활용하기 위해 제일모직을 상장한 후 합병을 추진하고도 어려움을 겪었다. 시간에 쫓기던 현대차그룹이 먼저 상장하는 대신 분할 및 합병이라는 복잡한 수를 고안해 자충수를 둔 것 아니냐는 지적도 있었다.
SK그룹은 2015년 SK㈜와 SK C&C 합병 당시 최태원 회장이 최대주주인 SK C&C에 유리한 합병비율이 정해졌다는 지적을 받았다. 국민연금은 합병에 반대했다. 롯데그룹은 지난해 지주사 체제로 전환했는데 소액주주들은 계열사 분할합병이 주주들의 이익과 배치된다고 반발한 바 있다. 두 그룹 모두 법규에 따랐다는 점을 강조했고 합병은 완료됐다.
대형 법무법인 변호사는 “합병비율 산정보다 그 기준이 되는 가격이 공정하게 형성돼 있느냐가 중요한데 시장가가 조작됐을 것이란 의심을 받는 사례도 많았다”며 “기업들은 법이 정한 방식에 따랐다는 명분으로 면죄부를 받고 있다”고 말했다.
대기업과 대주주들의 전횡을 막고 소액주주들이 피해를 입지 않도록 제도적 장치를 보완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현재도 합병에 반대하는 주주들에겐 회사에 보유주식을 사달라고 할 수 있는 권리(주식매수청구권)가 보장된다. 매수가격은 주주와 법인간 협의로 결정하되, 합의되지 않을 경우 이사회 전 주식 거래가격을 기준으로 하고, 그래도 결론이 나지 않으면 법원이 결정하게 된다.
그러나 소액주주들이 합병비율을 문제 삼기엔 시간이나 비용 등 현실적인 걸림돌이 많다. 중립적인 법원이 보다 적극적이고 신속하게 매수가격에 관여할 수 있도록 하는 장치가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부당한 합병비율로 주주들에 피해를 입힌 경우 기업이나 최대주주의 보상 책임을 강화하는 것도 합병 공정성을 높여줄 방안으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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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베스트조선 유료서비스 2018년 06월 19일 07:00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