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자자 달래기도 고심…자사주 매입 두고 부채 걱정
'딥 체인지' 발표했지만, "그룹 철학과 멀다" 지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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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그룹 주요 계열사들은 이맘때면 최태원 회장이 내린 숙제를 푸는 데 고심한다. '사회적 가치' 고도화가 대표적이다. SK그룹은 계열사별로 사회적 가치를 점수화시켜 측정할 수 있는 시스템을 공개하고, 이 지표를 경영진의 경영성과(KPI)에 반영하겠다고 밝힌바 있다.
사회적 가치는 ▲경제간접 기여성과(고용·배당·납세) ▲비즈니스 사회성과(환경·사회·거버넌스) ▲사회공헌 사회성과 등 세 가지 영역으로 나눠 공개된다.
지난해 5월 SK이노베이션은 세 가지 지표 중 자사의 비즈니스 사회성과가 1조1884억원 적자라고 설명했다. 그룹 다른 계열사들의 관심은 올해 SK이노베이션이 자사 성과 지표를 어떻게 추산해 내놓을지에 쏠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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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LG화학과 벌였던 소송 결과가 지표에 반영될지 여부다. 미국 ITC는 지난 3월 LG화학이 제기한 전기차 배터리 영업 비밀 침해 소송에서 SK이노베이션의 조기 패소 결정을 내렸다. 판결문은 "SK이노베이션의 증거인멸 행위와 ITC의 포렌식 명령 위반에 따른 법정모독 행위를 고려해 LG화학의 SK이노베이션에 대한 조기 패소 판결 신청은 정당하다"고 적시했다. 통상적으로 ‘증거인멸’ 혐의는 ▲고의·조직적인지 ▲삭제 인멸한 자료가 소송과 관계가 있는지 ▲상대방에 분명한 피해를 줬는지 여부를 모두 충족해야 하는 점이 모두 고려되는데, 이런 혐의가 인정된 셈이다.
법조계에선 본격적인 청문절차(Hearing) 이전 ITC가 조기 패소 판결을 내려 일방적인 결정을 내린 점은 이례적이라고 보고 있다. 이른바 “다퉈볼 여지도 없이 명백하다”고 ITC가 공식화했다는 설명이다.
SK이노베이션 직원들이 LG화학 자료를 수집하고 은폐한 이메일 내용, 증거들의 삭제 지시 정황 등도 판결문에 대부분 적시됐다. LG화학은 주요 로펌 등 자문사들을 통해 합의에 나설지 여부와 구체적인 손배 액수 및 합의금 산정 시나리오 마련에 돌입한 것으로 전해진다. SK이노베이션 입장에선 당장의 금전적인 손실도 고민거리지만, 법정에서 인정된 자사의 행위들이 그룹이 내건 '사회적 가치'와 역행된 점도 고민거리가 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소송 과정에서 잡음도 만만치 않았다. 여기에 ‘경제 간접 기여 성과’ 산정에도 고심이 깊은 상황이다. 조기 패소 여파가 시작된 상황에서 코로나 및 유가 변동까지 겹치며 회사의 주가는 글로벌 정유사 중 가장 큰 폭의 하락을 겪기도 했다.
정유업이 대외 환경에 따라 분기에 조단위 돈을 벌고 조단위 손실을 보는 천수답 사업인 점은 투자자들도 공감하고 있다. 다만 문제 제기는 '호황에 번 현금을 그간 어디에 썼는지'로 쏠리고 있다. 그룹 전략에 맞췄다지만 수천억원을 중국 내 투자 법인(SK차이나) 출자로 소진한 점이 꼽힌다. 이에 2018년 77%로 양호했던 부채비율은 지난해 117%까지 상승했다. 1분기 영업적자만 증권가에선 8000억원에서 최대 1조원까지 거론되는 상황에서 배터리 투자비용으로만 약 1조5000억원을 소진해야 한다.
연 초 자사주 매입으로 5800억원을 투입하겠다 밝혔지만 주가 부양보다 차입금 상승 우려가 더 큰 상황이다. 무디스 S&P 등 국제 신용평가사들도 연이어 등급 하향에 나섰지만, 오히려 내부에선 전기차 투자를 보수적으로 보는 글로벌 신평사에 대한 불만도 나온다.
그룹 내외에선 일찌감치 SK이노베이션이 애초 100% 지분 들고 있는 SK에너지, SK종합화학, SK루브리컨츠 등 주요계열사 혹은 보유 자산을 통한 '자산효율화' 방침이 2015년부터 꾸준히 거론됐다. 다만 본사 내부 '유공'출신 인력들 헤게모니탓에 과감한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는 평가도 나온다. 사명 변화까지 시사하며 석유화학 일변도에서 탈피하겠다는 의지를 밝히고 있지만 업황을 고려할 때 제값을 받긴 쉽지 않아졌다. SKC가 지난해 안정적인 수익을 내던 화학사업 지분을 매각해 전기차 부품사 KCFT 인수를 단행하는 등 빠른 변화를 보인 점과도 대비됐다.
그룹에 정통한 관계자는 "최태원 회장이 말한 딥 체인지(Deep Change)는 지금 돈을 벌고 꾸준히 잘 되는 사업을 접더라도 성장성이 확실하고 글로벌 헤게모니를 쥘 수 있는 신사업으로 과감히 진출해야 한다는 철학이다"라며 "원가 변동에 맞춰 수 년째 하던 대로 NCC 설비를 끄고 켜는 게 어떻게 딥 체인지인지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SK이노베이션은 "ITC 예비판결이 나긴 했지만 다퉈봐야 할 단계가 남았고 항소 등을 통해 회사 입장을 설명할 예정이며 사회적 가치 반영 여부도 최종 결론이 난 후에 결정될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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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베스트조선 유료서비스 2020년 03월 31일 07:00 게재]